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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거북이 Aug 12. 2023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

경북 구미시에서의 삶

 2005년 입사 후 처음 부산에서 구미로 왔을 때, 구미 토박이 동기에게 구미 구경을 시켜 달라고 했더니, 금오산 저수지 한 켠에 있는 자판기로 가서, 커피를 뽑아주면서, 아주 맛있는 커피이고, 구미 사람들은 다 최고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잔뜩 기대를 하면서 마셔봤는데, 별다르게 맛있지는 않았다. 그저 동전을 넣고, 뽑은 종이컵에 담긴 일반적인 커피였다. 혹시나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특이한 점은 커피를 저을 수 있는 스틱이 같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자판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너무나 뜬금없는 장소에 있다는 것, 두 가지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날은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자판기였다. 이름도 있었다. ‘금오산 길다방’, 왜 여기 자판기 커피가 유명한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유연근무제, 자율출근제도 없었고, 주 40시간 근무도 강제성이 전혀 없었다. 잔업, 특근이 일상다반사였고, 잔특근비도 제대로 받기 어려웠다. 그 때, 잔특근비만 다 받았더라도, 지금보다 5평은 큰 평수에 살고 있을 것 같다.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혼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나는 기러기 아빠인 선배들을 대신해 주말에 특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구미는 타지 사람들 비중이 굉장히 크다. 예전에는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인근 대구나, 김천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이러다 보니, 금요일 퇴근시간에는 택시가 공단에서 구미역 방향으로만 지나다니고, 일요일 저녁에는 반대로 구미역에서 공단 한쪽 방향으로만 다니곤 한다. 


나는 주말에 특근이 없으면, 한쪽 방향으로만 다니는 택시나 한쪽 방향에서만 승객을 가득 태우고 있는 버스를 타고, 구미역으로 갔다. 부산에 내려갔다가 일요일 저녁에 다시 구미로 돌아오곤 했다. 토요일 특근이 있으면,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때라도 바로 부산에 내려갔다. 힘들고, 번거로운 일상이었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곳에 부모님이 계시고,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부산 사람이니까.   


출근길, 한쪽 방향으로만 차들이 통행하고 있다. 

 

 몇 년 시간이 지나자, 구미 생활이 익숙해지고, 정도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 부산에 내려가는 것이 조금씩 싫어졌다. 어느 날 피곤해서 토요일 오전 9시쯤 잠에서 깼다. 귀찮은데, 그냥 내려가지 말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토요일의 회사 주변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닌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평소 점심식사를 하러, 또는 외근이나 다른 업무로 인해 바쁘게 돌아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간혹 눈에 띄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표정들이었다. 회사 근처 인동 롯데리아 2층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손님이 아무도 없는 스타벅스에서 혼자 커피를 주문하고, 할 일도 없는데, 영화나 보자고 들른 영화관도 무척이나 한산했다. 


유레카! 구미 생활 몇 년 만에 구미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바보같이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복잡하고, 힘들게 살았을까? 


구미 공단은 평일에는 도회지, 주말에는 한적한 시골마을이 된다. 시립 도서관에도 열람실 빈자리가 넘쳐났다. 부산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즈음에, 잔업이 적은 부서로 옮기게 되고, 기숙사에서 원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퇴근 후 개인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인동에 처음 들어선 외국어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 불규칙적인 직장인들을 위해 저녁 7시, 8시, 9시 동일한 수업이 있었고, 어느 시간에 가든 상관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매일 9시 수업을 들었다. 9시 수업에 가장 수강생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듣는 원어민 중국어 수업은 9시 수업에 가면, 보통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원어민 선생님이랑 개인 과외를 하면, 당연히 학원비의 몇 배 금액을 지불해야만 한다. 만약 일반 학원에서 한 명만 계속 수업에 온다면, 폐강해 버리고, 다른 시간대로 옮기거나 환불을 받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주로 직장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직장인 친화적인 학원의 약점을 파고들어, 독과외를 하는 바람에, 내 중국어 실력은 금세 일취월장해 버렸다. 


이제는 결혼을 하고, 가정도 꾸렸고, 아이들도 있기 때문에, 회사 근처 인동, 진평동에서의 겪었던 구미의 장점은 모두 추억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이 구미에 있으면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첫째 아이의 경우 금오랜드 빙상장에서 무료로 스케이트 강습도 꽤 받았고, YMCA에서 수영 강습도 저렴하게 받고 있다. 경쟁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다. 부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타도시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나 동기들은 어린이집 대기 몇 번인데, 안 될 것 같다. 예체능 학원을 보내려고 하는데, 자리가 없다. 라는 말을 할 때, 이게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구미에 살면, 정말 지겹도록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루 24시간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과 금오산, 그리고 낙동강이다. 


유리와 시멘트와 돌로 이루어진 여타의 건물들은 밤이 되면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 잠들어 버리지만,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는 구미의 큰 건물들은 잠도 없이, 열심히 살아서 숨을 쉰다. 일반적인 대도시의 야경은 화려하다. 화려한 불빛과 네온사인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지만, 구미에 비한다면 속 빈 강정일지도 모른다. 한 밤중에도 석유에서 실을 뽑아내고, 모래를 녹여 유리로 만들고, 쇠를 조각하고, 형형색색의 플라스틱을 찍어내고, 실리콘 웨이퍼에 회로를 그려내는 공장이야 말로, 우리나라에서 심장이나, 허파의 기능을 하는 중요한 존재들이라 생각한다.     


구미 삼성전자 2캠퍼스 _ 매연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수증기'라고 쓰여있다. 


 금오산은 도립공원이다. 원도심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도립공원이 있는 경우가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깝고, 접근성이 뛰어나다. 우리집에서 6살 둘째 아이가 충분히 걸어서 초입까지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저수지도 있고, 폭포도 있고, 구미산성도 있고, 금오랜드, 캠핑장, 케이블카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 그리고, 산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금오산을 오르는 것은 나에겐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금오산 포토존에서


 구미 원도심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운전하다가 옆사람에게

“잠깐 금오산에 들렀다 갈까?”라는 말을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갑자기 단풍이 보고 싶을 수도 있고, 봄의 새싹이나 꽃이 보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맑은 날,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금오산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옆사람의 대답도 대부분 “Yes”일 것이다. 


아마 내가 살던 부산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잠깐 산에 들렀다 갈까?”라고 옆사람에게 묻는다면, 열에 다섯 사람은 

“미쳤나?”라고 답할 것이고, 나머지 다섯명은 “돌았나?”라고 말할 것이다. 만에 하나 산에 가자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과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일 것이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부산에 대해 잘 모르는 구미 사람일 것이다. 부산에서는 갑자기 차를 몰고 가볍게 갈 수 있는 산이 무척이나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금오산처럼 볼 거리가 많은 산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집 베란다에서 바라본 금오산

                            

수많은 구미 사람들이 출근길, 퇴근길에 낙동강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출퇴근 길이 구미대교, 산호대교, 남구미대교 중 한 곳을 통해 낙동강을 건너는 루트이다. 내가 살던 부산에도 낙동강이 흘러가지만, 도심에서 멀리 있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두 번 낙동강을 볼까 말까 하다. 서울 사람들은 한강을 많이 보긴 하겠지만, 구미 사람들과 낙동강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다. 금수강산에 살면서, 도립공원인 금오산과 남한에서 제일 긴 강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낙동강에는 동락공원이 있다. 구미에 있는 공원 답게 많은 기업들의 후원으로 꾸며진 곳이다. 전자신종, 풍차, 인라인 스케이트장 모두 구미에 있는 기업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 들이다. 여기도 접근성이 좋아서, 많은 구미 시민들이 찾는다. 특히나 봄철 벚꽃길이 너무나 아름답다. 강변에서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은 봄철 구미에서 가장 볼만한 풍경일 것이다.     

 

구미의 또 다른 벚꽃 명소 금오천에서 


기업들이 몰려 있는 만큼, 회식 문화도 발달되었고, 많은 맛집들이 있다. 회식할 때마다 장소 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 번 간 곳은 최소 몇 달이 지나야 다시 회식 장소로 선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만큼 훌륭한 맛집들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 안 가본 곳만 대충 추려도 보통은 열 손가락에 다 꼽을 수가 없다. 


    구미는 타지 사람들과 구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공장과 농지가 뒤섞여 있고, 이질적인 것들이 조화롭게 섞여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구미에 17년간 살고 있는데, 만약 가장 구미다운 풍경이 어떤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공장지대를 관통해 흐르는 이계천에서, 겨울철 공장에서 배출하는 따뜻한 방류수에 몸을 녹이고 있는 물고기와 오리, 겨울 철새들의 모습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서로 잡아먹지도, 싸우지도 않고, 한 공간에서 함께 그저 온기를 느끼고 있는 그 하나의 장면은 평화를 주제로 하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느껴진다. 


이계천 _ 벤치 옆 왜가리


소소하지만 행복한 삶,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소설의 목동은 밤하늘의 별들의 이름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 영혼의 수레, 장 드 밀랑의 지팡이, 병아리 장, 마글론, 프로방스의 피에르 등등, 프로방스 사람들이 직접 별들의 이름을 짓고, 그럴듯한 별들의 이야기와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별들의 이름이 불리어진다. 


“구미에 뭐 볼 게 있어서 아직까지 살고 있냐?” 


타지역에 사는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글쎄, 정답은 아니지만, 구미에도 구미에 사는 사람들만의 소중한 것들과 추억, 삶의 기억, 문화가 있다. 나 또한 17년간 구미에 살면서 많은 소중한 것들이 생겼다. 프로방스 밤 하늘의 이름 있는 별들처럼. 


마지막으로 금오산 길다방 이야기를 다시 하고자 한다. 아쉽게 몇 년 전 사라졌지만, 완전한 구미 사람이 되고 나서 다시 맛본 길다방 커피맛은 아주 훌륭했다. 왜 맛있었는지, 훌륭했는지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수지 둘레길 2.4km를 한 바퀴 돌고나서 마시면, 훨씬 맛있어진다. 등산을 마치고 마시면 더 맛있을 것이다. 뜬금없이 저수지 둘레길에 위치하고 있기에, 처음 보면 신기하고, 다음에 또 보면 반가운 그런 자판기인 것도 사실이다.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눈을 감고나서 어떻게 생겼는지, 색깔은 무엇인지, 버튼은 몇 개인지, 기억이 나는 자판기는 금오산 길다방 단 하나뿐이다. 만남이 특별함이 되고, 추억이 되고, 반가움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이것이 소소하지만 행복한 구미에서의 삶의 맛이 아닐까 싶다.     


금오산 저수지와 금오정


- 덧붙이는 글 –


금오산 길다방이 있던 자리에는 성리학 역사박물관이 지어져 있으며, 현재 카페가 입점해 있다. 성리학 역사박물관에는 조선 성리학의 시작이자 조종(祖宗)인 야은 길재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야은실이 있다. 이 분의 대표적인 시조는 금오산 채미정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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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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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은 의구하되 길다방은 간 데 없다. 라고 잠시 생각한다면, 선현(先賢)께 누가 될까? 모르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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