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부산자랑 10가지 순회 시민예술제 장려상
부산 차이나타운, 개항기 중국 영사관이 있던 장소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중국인 밀집 지역이 된 곳,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이 들어오며 유흥주점이 늘어서 텍사스 거리라고 불리기도 한 곳, 러시아 선원들과 동남아 등 외국인들이 많은 곳,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 분명, 차이나타운 근처 부산역이나 그 근방을 수도 없이 지나쳐갔을 것이나, 화교들이 중심이 되어, 중화권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 줄 꿈에도 몰랐다. 다만, 가끔 차이나타운 내 유명한 맛집인 홍성방이나 신발원, 사해방에서 음식을 먹을 때면, 와 이곳은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정말 중국 같다. 라는 생각은 하였었다.
아무튼 이곳을 알게 된 계기도 좀 이상하긴 하다. 중학생 시절, 영어를 배우러 영어회화 학원에 다녔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원어민 강사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수강생들은 다 고등학생, 대학생, 또는 직장인들이라, 사실 내가 그 반에서 제일 영어를 못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내 또래의 여학생이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 여학생마저도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면 어쩌나? 라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옆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는데, 영어 실력은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천만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는데, 뭔가 계속 필기를 하는데, 글자가 이상한 것 같았다. 슬쩍 필기하는 노트를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자로 모든 내용을 필기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정도만 한글을 사용하였고, 너무나 완벽한 국한문혼용으로 글자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90년대 초반이라 학교 선생님 중에서도 본인의 한자 실력을 뽐내기 위해,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 한자를 휘갈겨 쓰시는 분들이 더러 있던 때였다. 물론 그 당시 나의 한자 실력은 형편없었다. 이렇게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학생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곧 열등감이 생겨나서, 학원을 그만둘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 여학생이 차이나타운 화교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해가 풀렸고, 호기심 때문에, 그 여학생에게 이것저것 질문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에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이, 그것도 내가 살고 있는 부산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막 한중수교가 되었을 때라,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중화권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중국인 관광객도 없었고, 한중수교 이전에는 한국전쟁 때, 중국이 북한을 도와 참전했기에, 중공이라고 부르며, 혐오하고, 배척하는 사회 분위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차이나타운으로 불리지만, 그 당시에 우리는 화교거리라고 불렀었다. 아무튼 그 여학생이 계기가 되어서, 그 이후로 대만이나 홍콩 유명 가수들의 음반을 구하기 위해, 또는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자주 차이나타운을 찾아갔었다. 혼자 가는 것은 무서워서, 친구들과 항상 같이 갔었다. 한러수교도 체결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소련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차이나타운에는 러시아 선원들도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덩치도 크고, 여기저기 문신도 한 러시아 선원들이 괜히 무섭게 느껴져서, 혼자 갈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이젠 더 이상 차이나타운을 방문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 학원, 도서관과는 먼 곳이라, 대학생 때는 친구들과 만나서 놀 만한 분위기의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차이나타운은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게 되면서 나는 부산을 떠나게 되었다. 주말마다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왔는데, 토요일 아침에 부산역에 도착하면, 항상 점심시간이라, 부산역에서 점심을 사 먹곤 하였다. 몇 달이 지나자, 부산역에 있는 맛있는 식당은 다 가 본 곳이 되었고, 어느 역에나 있을 법한 프랜차이즈 식당 음식이 질리기 시작했다. 어디 역 근처에 맛집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차이나타운에 있던 맛집들이 생각났다. 홍성방, 신발원 등등. 다시 방문한 차이나타운에는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그 식당들이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매주 토요일 나는 차이나타운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볶음밥 한 가지였다. 항상 똑같이 맛있었다.
중국어를 배우게 되면서, 어느 날 의욕만 과하게 앞서서, 나는 차이나타운 중식당에 들어가서 중국인 행세를 했다. 중국어로 인사를 하고, 주문을 하고,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미친놈 취급을 당하였다. 빈폴 남방과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르까프 운동화를 신고, 삼성카드로 결재하는 중국인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중국어도 잘 알아듣는 종업원은 내가 말하는 모든 중국어에 한국어로 대답했다.
“중국어 배운 지 얼마 안 되셨죠?” 종업원의 마지막 말에 나는 정말 한없이 부끄러워져서, 이 후,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부산에 갈 때, 기차를 타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가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에 밥 먹으러 가기는 어렵다. 근처에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다. 부모님 집을 가기 위해서 부산터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상해거리 문을 비켜 지나가게 된다. 그때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마음속으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곤 한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다시 예전처럼 기차로 내려와서, 차이나타운에 들르고 싶다. 부산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아 내가 고향에 왔구나 하는 것을 운전하면서 딱 세 번 느끼는데, 톨게이트, 차이나타운, 그리고, 동네 입구에 들어설 때이다. 그 만큼 나에게는 추억이 있고, 정이 든 곳이다. 다음에 방문할 때까지 항상 예전 모습 그대로 있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