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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체적인 발가락 Mar 11. 2024

여자사우나 그들만의 세상

이따 사물함에 파김치 가지고 가요 형님

구도심의 한 오래되고 허름한 목욕탕은 새벽 5시에 문을 연다. 이 시간이면 '오픈조' 70대 후반과 80대 어르신들이 들어오신다. 연령에 따라 자연스럽게 3개 조로 목욕하러 오는 시간대가 나누어진다. 이곳의 보이지 않는 문화다. 6시 반에서 7시 반 사이는 60대와 70대 초반의 '중간조'가 모이는 시간이다. 다음 9시 반 이후에는 50대 중후반의 다소 젊은것들이 오는 시간이다. 60대 중반의 우리 엄마는 50대 동생들을 젊은것이라고 했다.

오픈조, 중간조, 젊은조


몰래하는 품앗이
눈치
사물함 키를 슬쩍 손에 쥐어주었다.

여자사우나는 정치, 경제, 사회, 심리, 철학이 오고 가는 그들만의 작은 사회다.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형성되고, 그 사회 안에서 인간관계는 서로 주고받고 챙겨주며 쌓여간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의 친밀도가 다 같을 수는 없으니 눈치가 중요하다. 아줌마들은 말도 많고 정도 많고 질투도 많고 눈치도 많다.


2인이 서로 주고받는 품앗이는 2가지 방식이다.

첫 번째 방식은  빈 사물함에 내가 줄 물건을 넣어두고 열쇠를 잠근다. 목욕탕에서 나가면서 슬쩍 수신인의 손에 사물함 키를 쥐어준다. '이따 나갈 때 파김치 챙겨가요 형님' 무언의 메시지다. 이후에 어느 날 그 형님은 떡을 같은 방식으로 발신인에게 품앗이한다.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은 조금 더 호흡과 눈치가 필요하다. 발신인은 자기 사물함에 물건을 넣어두고, 미세한 눈 맞춤과 귓속말로 '이따 나갈 때 사물함에서 파김치 가지고 가요 형님' 한다. 남들 모르게 살짝 속삭임의 테크닉이 요구된다. 여기서 자기 사물함이란,

매일 오는 정기권 멤버십이 있는 회원들에게는 각자 번호가 있는 사물함이 있다. 여기서 정기권이란 한 달 단위로 선불 결제를 하고 사용하는 티켓이다. 중간에 개인 사정으로 오지 못해도 환불은 불가다.


주고받는 품앗이 물품은 다양하고 풍요롭다.

배추김치, 물김치, 깍두기, 생고기. 찐 고구마, 구운 김, 떡국 끊일 닭장, 각종 반찬 등등


오늘은 내가 사골 쏠게
(사골=우유요구르트)


대놓고 품앗이


앞서 언급한 품앗이는 2인이 눈치를 주고받으며 이뤄지는 행위라면 여자사우나에서는 대놓고 품앗이도 한다.

이 경우 다수의 참여자가 생긴다.

돌아가며 쏘기다. 당신은 사우나 안에서 땀 빼며 먹는 얼음 송송 아이스커피의 맛을 알 것이다. 큰 어르신들의 사우나에는 또 다른 메뉴가 있다. '사골'이라고 불리는 우유와 요구르트를 적절한 배합으로 섞은 것이다. 사우나에서 누군가 커피나 사골을 시키면 두상보다 큰 그릇에 국자가 하나 담겨 컵과 함께 전달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또 다른 수건으로 자유롭게 깔고 앉고 가린 등장인물들은 마실 것을 주변으로 둥글게 세팅을 한다. 한 컵씩 나눠 마신다. 끝없는 수다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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