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통 두렵고 무서운 일이 있을 때 글을 쓴다. 남들이 다 말리는 이 길을 내가 꼭 가야만 하는지 두렵고 무섭고 초조할 때. 집을 살 때가 그랬고, 차를 살 때가 그랬다.
퇴사하기까지 1년 반을 고민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고민 글을 썼고, 매번 글을 마무리하지 못해 보관함에 잔뜩 쌓아두었다. 아무리 글로 마음을 정리해보아도 퇴사를 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사를 하고 싶은, 해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고 난 이후 그 간의 글들을 하나로 정리해보고자 하였으나 이미 지난 고민이라 글이 그다지 손에 잡히지 않아 내버려 두었다.
최근의 가장 큰 두려움은 내가 동대표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 29세에 동대표라,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최연소일지도...? 나도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잘할 자신도 용기도 없다. 무슨 거창한 야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장 두려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믿고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내가 옳은 길을 선택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발단은 아파트 보도블록 공사로 시작되었다. 내가 이사 온 뒤로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였는데, 엘리베이터 공사가 끝나자마자 보도블록 공사가 진행되었다.
아파트에서 이렇게 큰 공사를 연이어하는 것은 처음 보았고, 또한 내게 보도블록 공사란 예산이 남아돌 때 하는 공사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부분 보수가 아닌 전체 보도블록 교체 공사를 하는 이유가 뭔지? 왜 큰 공사를 연이어 잡았는지? 다소 의문이 있었으나 사실 이때까지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내가 이사오기 전에 다 결정이 난 사항이고, 공사를 하면 하는 거겠거니... 하는 마음이 컸다. 기상 문제로 인해서인지 공사는 지지부진하였고, 지상 주차장을 쓰는 오래된 아파트이니 만큼 주차장을 포함한 아파트 전체가 모래 투성이가 되었다. 공사 기간 동안의 불편함을 만회할만한 결과가 있었다면 크게 불만이 없었겠지만, 솔직히 공사 결과는 최악이었다.
보도블록의 색상과 디자인은 이전보다 훨씬 못했고(물론 주민투표가 있었겠지만), 보도블록 양가 틈새를 블록조각으로 채우지 않고 대충 모래로 채워두었다. 그것 때문인지 주차장은 몇 달간 모래밭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설마 이게 공사가 끝난 거야? 생각했는데 옛말은 틀린 게 없더라.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돈은 돈대로 쓰고 대체 뭐가 더 좋아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새빨간 색으로 바뀐 보도블록을 밟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 그러나 내가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이미 끝난 공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갔다. 뭐 평생 이 아파트에서 살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때는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파트가 고소를 당했다는 공고문 때문이었다. 업체가 공사 추가금액을 요구하였으나 아파트 측에서 돈을 주지 않아 고소를 당했으며,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니 몇백만 원의 변호사 선임비용을 관리비에서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악덕 업체가 돈을 노리고 일부러 고소를 했다는 식의 뉘앙스였다.
공사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데 심지어 고소까지 당하다니. 그래도 뭐, 계약서가 있으니 변호사를 선임하면 어련히 잘 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 뒤 변호사 검토 결과, 고소가 진행되면 아파트 측이 불리하므로 변호사가 합의를 권장했고, 변호사의 권장에 따라 일정 금액에 합의를 진행하겠다는 공지가 붙었다. 업체가 요구한 금액은 1억대였고, 합의금은 그보다는 낮았으나 몇 천만 원에 달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 공지의 내용이 마음에 불을 붙였다. 제대로 실측을 하지도 않고 공사를 진행하였고, 물량산출 착오로 추가 금액이 발생하였으며, 추가 공사비(합의금)를 지불하게 되었으나, 결론적으로는 '당 아파트가 이득을 본 상황입니다.' 황당한 문구였다. 이득을 보았다는 데에는 밑줄까지 그여 있었다.
공지의 내용은 어떻게든 소송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문장으로 가득했다. '위 사건으로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고'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아파트 관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업체가 전적으로 잘못했으나, 입주민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도가 담뿍 느껴졌다.
냄새가 났다. 업체를 선정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뭔가가 있어 보였다.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 혼자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변에 이야기를 해봤지만 다들 그거 참 의심스럽다 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뭘 어쩔 수 있겠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일은 그대로 넘어가는 듯했다. 누군가 아파트 각 동마다 대자보를 붙이기 전까지는.
동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업무 진행을 기록해둘 필요성을 느껴 글을 남긴다.
어쩌면 이 글로 인해서 불필요한 시비에 얽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대표 입후보를 망설일 당시 '아파트 회장 분투기'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므로 이 글 역시 언젠가 동대표 입후보를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30살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사는 이곳이 쾌적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동대표를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틀 뒤가 임기 시작 후 첫 번째 회의이다.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입주자 대표 회의에서 아주아주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부디 [고군분투 동대표 일지]를 써나가는데 힘입어, 제발 중간에 어디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일을 잘 마칠 수 있기를 바란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