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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20.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과한 웃음으로 포장한 극심한 우울증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분노하고, 좋으면 미소 짓고, 싫으면 찡그리는 행위들.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 따른 행위들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너무 기쁜데 우는 경우가 있다. 보통 시상식 때 트로피를 들고 수상 소감을 얘기할 때가 그렇다. 또한 슬픈데 웃는 경우를 보면 너무 슬퍼서 헛웃음이 나올 때, 좋은데 찡그리는 경우를 보면 상대방에게 장난을 칠 때, 싫은데 미소 짓는 경우를 보면 상대방에게 정중히 거절할 때가 그렇다.


 특히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보면 좋아도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고, 싫어도 그다지 싫은 것 같지 않아 상대방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마음은 우울한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그다지 우울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말 놀랄만한 사실은 마음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가다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워낙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예전 고등학교 학창 시절 때, 비록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내 주변에서 함께 했던 친구 한 명이 있었다. 그 친구는 여학생들 중에서 키가 가장 컸던 아이로서 항상 교실 맨 뒤에 앉아 “하하하하” 큰소리로 웃으며 반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어 나갔다. 그 친구는 워낙 키도 크고, 체격도 있다 보니 어떤 때는 친구들을 보호해 주는 보디가드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같은 반 친구들이 그 무언가로 힘들어할 때는 늘 그 친구가 먼저 다가가 위로해 주곤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친구가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점심시간에 홀연히 사라질 경우, 심지어는 며칠 동안 결석을 할 때도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어! 00이가 우는 것 같은데?”

 “그러게. 잠깐 나갔다 오더니 무슨 일이 있었나 봐.”

 “좀 전에 복도에서 00이랑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무슨 얘기?”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럼, 우리 반의 분위기 메이커인 내가 가서 달래줘야지.”

 “역시 00이는 우리 반 보디가드라니까. 파이팅!!”

 “00아, 무슨 일 있었어?”

 “…….”

 “말 좀 해봐. 도대체 무슨 일인데.”

 “…….”

 “너 그럼 내가 지금부터 배꼽 빠지게 웃겨줄 거야. 자! 디∼리리리리리! 안넝하데요, 00 띠. 도대테 누가 우디 아듬다운 00이들 이덯케 화나게 만드런냐. 당장 나와다. 혼내두고 말 테다.”

 “제발 그만 해. 웃겨 죽겠어.”

 “와우! 00이가 웃었다.”


 우리 반 아이들 중 누군가가 운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 친구는 마치 보디가드처럼 나타나 결국 웃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끔 분위기를 180도 확 바꿔놓곤 했다. 매번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웃으면서 때론 바보처럼, 때론 엄마처럼, 때론 인자한 아저씨처럼 아이들에게 늘 편안함과 즐거운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가 아이들에게 써준 관심만큼 그 친구를 향한 관심은 의외로 초라했다. 그 친구가 없는 빈자리!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는 일상이 그 자리를 더욱더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여하튼 내가 바라본 그 친구는 무척 키가 크고, 덩치도 꽤 있었던 그런 친구였다. 곱슬머리에 얼굴엔 여드름이 쫙 피었고, 도톰하면서도 약간 까진 입술의 그 친구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늘 “하하하하” 큰소리로 웃곤 했다. 여기에서 코맹맹이는 일부러 내는 소리가 아닌 그 당시 축농증 증세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기억 속, 유쾌했던 그 친구의 소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흐른 뒤 나에게로 전해졌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고. 도대체 왜? 난 믿을 수 없었다. 좀 과하게 웃는 경향은 있었지만 그 웃음이 결국 거짓 웃음이었다니…….


 그때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 역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참 씁쓸했다. 그 친구는 왜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상대방에게는 늘 즐거운 모습만 보여줬을까? 그리고 정작 자신이 괴로울 땐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하지 못한 채 왜 홀로 감당해야만 했을까? 게다가 같은 반 아이들 역시 그 친구가 늘 유쾌한 아이로 인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작 그 친구의 숨은 괴로움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도 물론 그랬으니까.          


 솔직히 내 입장에서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간에 늘 행복하게만 보인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고민이나 갈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들의 삶에도 분명 즐거움과 행복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여하튼 그 친구의 자살 소식을 접한 뒤 이어지는 뒷얘기로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집에서 무척이나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극심한 우울증을 과한 웃음으로 포장했다고 할까? 사실 그 친구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꽤 있다. 한 예로 매번 그 사람을 볼 때마다 환하게 웃고 있어서 나름 행복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위험할 정도의 깊은 우울감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힘든 부분을 내색할 경우, 뭐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자존심이 상해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결점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나를 떠날 것 같아서? 그런데 문제는 밖에서 자신의 내면을 숨기는 사람은 분명히 안에서 그 참았던 분노를 터트린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얘기인데……. 어느 40대 중년 남자가 사회생활을 통해서는 “정말 사람 좋다.”라는 평판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만 들어오면 폭군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면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진정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스스로를 잘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사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더라도 정작 가정에서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 소중한 가족에게는 영원히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 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먼저 찬찬히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상대방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정말 외롭고 힘들 때,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친구는 그렇게 멀고도 외로운 길을 떠나지 않았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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