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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24.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자식

 “엄마, 나 왜 낳았어?”


 순간, 드디어 나올 말이 나왔구나 싶었다. 첫째 딸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내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그 말 한마디. “엄마, 나 왜 낳았어?”사실 나도 내 엄마에게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난 사춘기가 남들보다 조금 늦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그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부정적으로만 보였고, 그로 인해 내면에 쌓여가는 분노를 가장 만만했던 내 엄마에게 다 쏟아붓곤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날따라 학교에서의 일들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전날 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컨디션도 썩 좋지 않았던 데다가 시험 결과며, 친구 관계며, 선생님에게 혼난 일이며 모든 게 다 뒤죽박죽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 기분으로 야간 학습까지 다 끝마친 뒤 거의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난 곧바로 내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엄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와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는데, 난 홧김에 “엄마 나 왜 낳았어? 이 세상에 안 태어났으면 이렇게 힘들지도 않았을 것 아니야.”라고 윽박질렀다. 그 순간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냥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 보건대, 그 당시 엄마가 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깨닫는 부분이다.


 내가 첫째 딸아이에게 “엄마, 나 왜 낳았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됐건 내가 낳은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지금은 물론 첫째 딸아이의 사춘기가 지나가서인지 그 같은 말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곱씹어 보곤 했다. 나는 원해서 낳았지만 아이는 결코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엄마의 집착이나 간섭을 아이가 싫어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내가 낳았지만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매개체는 바로 첫째 딸아이의 사춘기였다.


 “부모가 죄인이냐?”, “너도 결혼해서 너랑 똑같은 아이 낳아서 키워 봐.”라는 부모의 말과 “엄마, 나 왜 낳았어?”라는 사춘기 아이의 말은 아마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회자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과거 우리네 부모님들도 공감을 했던 부분이고, 지금 나 역시 공감을 하고 있고, 또 아이들도 부모가 되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에 절대 공감할 수 없다는 부모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주변의 지인들 얘기를 들어 보면 하나 같이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웃긴 건, 요 근래 친언니랑 통화를 하다가 새삼 알게 된 사실인데……. 한창 사춘기로 방황하던 언니도 엄마를 향해 “엄마, 나 왜 낳았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전화통화를 하는 내내 우리 자매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엄마에게 우리가 바로 죄인이었다고 말하면서 당시 엄마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내가 낳았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키우고자 노력은 하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지,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에 숨이 "컥" 하고 막힐 때도 많다. 사실 자식을 낳아 키운다는 건 막대한 책임감이 뒤따른다. 보통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잘 되면 본인이 잘해서 그런 것이고, 안 되면 무조건 부모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마음도 모른 채 마치 청개구리처럼 행동한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또 그만한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부모 역할이 가장 힘들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듯싶다.


 지금은 첫째 딸아이의 사춘기도 거의 지나가고, 둘째 녀석의 사춘기도 최고의 위험 수위는 살짝 넘어간 것 같다. 사실 이 지긋지긋한 사춘기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순간부터 내 아이를 마치 옆집 아이 보듯 해서 그렇다. 하루 일과, 성적, 관심사, 친구 문제 등 아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이 궁금하긴 하지만 아이들이 먼저 꺼내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물어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저것 물어보는 순간 아이들은 곧바로 입과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집착하는 순간 그 즉시 벗어나려고 하는 인간의 자유 심리가 발동한다고 할까! 그리고 그런 심리는 가장 편안한 관계인 부모와 자식 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식에게 있어서 특히 엄마는 편안하고 만만한 존재니까.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면서 인내심이 참 많이 길러졌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사춘기 이전까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웠고, 그로 인해 애착이 집착으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혹독한 사춘기로 인해 결국 집착 또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품 안의 자식은 이제 없는 듯했다.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다 가버리고, 이제 서서히 독립을 준비하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였던 것이다. 아이들의 인생 2막! 여하튼 난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참 많이도 힘들고 외로웠지만 그게 바로 우리네 삶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은 오롯이 나를 찾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포유류 동물 가운데 사자는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낭떠러지에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남는 새끼만 키운다는 얘기가 있다. 어찌 보면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바로 서로가 살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일 수도 있다. 반면 자식을 키우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언제까지 자식을 보살펴 줘야 하냐는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캥거루족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현상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상관하다 보니 자식은 어른이 돼서도 독립의 절실함을 깨닫지 못한 채 부모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된다. 마치 다 큰 캥거루가 늙은 엄마 캥거루 배주머니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봤다. 어느 명문대 의대생이 지하철역에서 성추행을 하다가 결국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는데,……. 경찰이 핸드폰을 좀 보자고 하니까 그 학생이 엄마한테 먼저 얘기를 해봐야 한다고 했단다. 사실 이러한 민망한 일들이 우리 주변은 물론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촌수가 없는 아주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러한 관계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면서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가 첫째 딸아이에게 집착했던 그 시절은 너무도 불행했다. 난 나대로 아이가 내 기준에 못 미치면 화가 났고, 아이 역시 그런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나름 구속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이의 사춘기를 통해 서로를 향한 마음의 재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자식! 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부모! 사실 서로 간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책임감이 전제되어 있다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리일지라도 훗날 오히려 가족의 행복을 지켜준 아름다운 거리로 기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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