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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23.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하찮았던 엄마의 위대함

 아주 먼 옛날, 난 ‘엄마’라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곤 했다. 늘 한결같았던 나무는 내가 힘들어 지칠 때면 쉴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행여나 젖을까 싶어 온몸으로 막아주었고, 화가 날 때면 화풀이하라고 기둥까지 내어주곤 했다. 그럼 난 당연하다는 듯 나무 아래서 편히 쉬기도 고, 잠도 자고, 책도 읽었다. 그러다가 화가 치밀어 오를 땐 나무 기둥을 발로 차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기도 하고, 잎을 따기도 하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타기도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기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무를 쳐다보니 예전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너무도 초라해져 있었다. 내 아이가 자라고 나 또한 늙어가면서 나무가 그동안 나에게 베풀었던 그 큰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된 지금, 나무는 내 곁에 없다. 가슴이 아프다.


 나 어릴 적 엄마는 늘 수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만 하는 그런 엄마였다. 물론 그런 엄마가 화려했던 시절도 있었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엄마는 당시 엄마들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예를 들어 빨간 힐에 빨간 립스틱, 그리고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에 선글라스까지. 게다가 가족과 함께 야외 나들이를 할 때면 꼭 카메라를 옆에 메고 다니던, 그야말로 “헉” 소리 날 정도의 패셔니스트였다고 할까? 사실 난 그런 엄마가 창피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전형적인 엄마들의 모습은 뽀글이 파마에 홈드레스, 그리고 굽이 낮은 투박한 검정 구두가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간혹 가다가 생활한복에 흰 고무신을 신은 엄마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엄마는 뚜렷한 개성과 용기를 지닌, 시대를 앞서간 그런 멋진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엄마가 집안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봤다. 그 당시만 해도 세탁기가 있는 집이 드물었다. 따라서 세탁기가 없었던 엄마는 추운 겨울에도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찬물에 손빨래를 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물과 세제가 담긴 커다란 대야에 이불을 푹 담근 후 발로 꾹꾹 밟아가면서 찌든 때를 빼내곤 했다. 그럼 난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서서 따라 해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대야 밖으로 비누 거품과 물이 한바탕 튀었는데도 불구하고 뒷수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의 소소한 행복을 눈에 담아내기 바빴다. 사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모르겠지만 한겨울에는 발에 동상이 배길 정도로 시리고 아팠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손과 발은 늘 척척 갈라져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짜증 날 때가 많다. 내 경험상,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청소년기까지 무척 손이 많이 간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어보더라도 자신의 아이가 결혼해서 또 아기를 낳아도 여전히 자식에게 손이 가는 건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솔직히 난 아이들이 사춘기 이전까지는 혼도 많이 내고, 내가 힘든 만큼 내색도 많이 했다. 그건 아마도 아이들이 어렸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니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엄마를 밀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당연히 내 자식에게 관심을 갖는 것뿐인데, 자식은 그런 부모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간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춘기 이후부터는 부모의 자리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나의 엄마도 그 시기 때 많이 외롭고 힘들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의 엄마는 자식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남지 않기 위해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시대를 앞서간 그 멋진 패션 감각도 사라졌다.
 

 엄마의 삶을 죽 한번 들여다보면 그 무엇 하나 누릴 수 있었던 게 전혀 없었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그 당시의 엄마 역할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지금의 내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잘 자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의 엄마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지금껏 우리 형제들의 마음속에서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여하튼 그 당시 주방도 얼마나 열악했는지 세 끼 상 차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게다. 지금도 생각난다. 집 구조상, 주방이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또 오르내려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었는지 어느 날인가 엄마가 상을 들고 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한바탕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의 옷은 국과 김칫국물이 튀는 바람에 얼룩 범벅이 되어 있었고, 엄마의 손은 깨진 접시의 날카로운 부분이 튀어 올라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뒷수습은 아직 어린 자식들이 도와줄 수 없었기에 오롯이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지금은 김치도 사서 먹는 시대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갓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등 굳이 힘들이지 않고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위생적이고 맛깔스러운 김치들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사서 먹는 김치는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따라서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두고두고 먹을 김치를 미리 장만해 놔야 했기에 11월부터 12월까지 대부분의 엄마들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나의 엄마도 적게는 50포기, 많게는 100포기 정도 담갔던 것 같다. 김장하기 한참 전부터 김치에 들어갈 재료들을 하나하나 준비한 다음 김장 당일에는 준비한 재료들을 방 안에 죽 나열한 후 1년에 꼭 한번 거쳐야 할 거사를 치르곤 했다. 그러니까 김장 마무리까지는 준비할 게 너무 많아서인지 거의 한 달 정도가 소요됐던 것 같다.


 매번 그렇듯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그 많은 배추 속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방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커다란 양푼들과 썰어놓은 각종 야채들, 간 고추, 고춧가루, 마늘, 생강 다진 것, 새우젓, 각종 양념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벽 쪽에는 소금에 절인 배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하루 전 날엔 커다랗고 뻣뻣한 배추들을 일일이 굵은소금에 절여놓고, 늦은 밤엔 커다란 무를 힘겹게 채 썰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마도 내가 학교에 갔을 때는 그 절인 배추들을 하나하나 깨끗이 헹구어 내고, 배추 속에 넣을 양념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하교 후 집에 돌아왔을 땐 무채, 마늘, 생강, 청각, 파, 양파, 갓, 미나리, 새우젓, 고춧가루, 깨소금, 설탕 등을 넣고 한참 동안 버무렸을 맛깔스러운 양념으로 배추 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고된 작업을 오롯이 엄마 혼자 감당해 내면서도 자식들에게 짜증 한번 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김장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되었던 내게 깨소금을 듬뿍 묻힌 김치 한 가닥을 돌돌 말아 입에 쏙 넣어주고는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그때는 잘 몰랐다. 김장 100포기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는지……. 사실 난 김치를 주로 사 먹는 편이다. 인터넷 상의 마켓에서 내가 원하는 김치들을 카드로 결제하면 1주일 내로 집에 도착한다. 예전과 달리 정말 편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김치를 꺼내서 김치 통에 담고 뒷마무리 하는 것조차 번거로울 때가 있다. 그나마 그때그때 구입해서 먹기 때문에 보관 문제에 있어서도 별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런데 나의 엄마는 김장 때 담근 100포기의 김치를 그 무거운 장독에 보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그 추운 겨울, 커다랗고 무거운 장독을 장독대에서 수돗가로 옮겨 일일이 청소한 뒤 다시 장독대로 옮겨 100포기의 김치를 하나하나 채워나갔을 엄마의 고된 삶, 그 삶이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뼈저리게 가슴에 와 닿는다.


 게다가 그 당시만 해도 아궁이에 연탄을 떼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 흔히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보도들도 나오곤 했다. 우리 집도 각 방에 연결된 아궁이를 통해 연탄을 떼곤 했는데, 매번 겨울 때마다 연탄 갈기가 무척 귀찮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난 엄마가 일이 있을 경우에만 대신 갈아줬을 뿐, 대부분 그 역할도 엄마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가끔 눈 내리고 추운 어느 깊은 밤연탄을 갈려고 조용히 부엌으로 향하는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 행여나 제때 갈지 않아 연탄불이 꺼질까 봐 잠을 잘 때도 설 잠을 자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이야 방안에 달려있는 버튼만 누르면 보일러가 알아서 척척 가동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의 엄마는 연탄이 떨어질 때마다 매번 100장씩 주문을 해야 했고, 그 추운 겨울,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연탄을 집게로 들고 나와 각 방과 연결된 아궁이에 늘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사실 그 과정에서도 꽁꽁 얼어붙은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뼈에 골절상을 입는 경우 종종 있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조심성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컨대, 추운 겨울,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것도 연탄을 들고 얼어붙은 바닥을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의 심정을 한번 헤아려 보면 어떨까 싶다. 여하튼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가족들은 “아이고! 조심 좀 하지.”라는 잔소리뿐, 엄마의 그 외롭고 고단한 삶을 결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막상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있지 않으면 그 가정은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라는 존재는 늘 당연한 것이고,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한없이 외로운 자리였건 것이다. 물론 그건 아빠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나의 엄마는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기를 갖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신이 뼈저리게 느꼈던 엄마로서의 삶, 그 고단한 삶을 자식들에게 또다시 대물림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 게다.    


 아주 먼 옛날, 난 엄마가 집안의 허드렛일만 하는 하찮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하찮은 일은 우리 가족을 살려낸 가장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도 사회생활 할 만큼 해봤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다. 그리고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엄마는 나에게 정말 값지고 위대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그냥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정, 나아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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