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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17.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기대치가 내려가면 기쁨은 올라간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 무언가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가 그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 크나큰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실망감은 나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서로 상처가 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상대방을 향한 원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곧 기대로 이어지고, 그러한 기대는 스스로에게 ‘집착’이라는 마음의 족쇄를 채워 결국 ‘분노’라는 무서운 감정으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기대가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면 다행인데, 상대방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 모든 관계를 파멸로 이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대부분 기대치는 스스로를 향한 것도 있지만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에게 향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밖에도 직장에서든 각종 모임에서든 집단이익이나 개인 이익을 위해 한껏 기대를 걸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기대’라는 것은 결국 ‘만족’이라는 게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그 무언가에 기대를 걸었는데, 그게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보인다면 계속해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대의 끝은 어디이며, 그에 따른 만족 또한 어디까지일까?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봤다. 만족함이 없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왠지 숨이 막힐 것 같다. 늘 부족하고, 늘 여유가 없고, 늘 노력해야 하고, 늘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으로 인해 삶이 철저하게 피폐되지 않을까 싶다. 


 한 예로, 첫째 딸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가히 하늘을 치르던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착하고 공부도 잘하니까 그에 따른 기대치로 인해 욕심이 제어되지 않고, 마음은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지쳐가고, 그런 엄마의 모습에 한계를 느꼈는지 결국 사춘기 때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기대’란 상대방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하기도 하지만 결국 끝이 없는 욕심으로 인해 서로 간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나도 첫째 딸아이가 사춘기 때 완전히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나마 난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켜 나갔기에 지금 아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 당시 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아야만 했다. 사춘기 아이에게 기대를 한다는 것은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 아이를 향한 기대치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서로 간의 관계 회복에 있어서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곧, 기대를 안 하면 실망할 일이 없기 때문에 관계 또한 나빠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 굳이 기대를 안 해도 상대방은 기대 이상의 것을 해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중요한 건, 기대치가 없다 보니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대를 안 한 상태에서 상대방이 기대 이상의 것을 했을 경우엔 오히려 그 기쁨은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이번엔 둘째 녀석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첫째 딸아이를 향한 기대치와는 달리 중학교를 다니는 둘째 녀석에게는 애초부터 기대를 다 내려놓고 시작해야만 했다. 물론 첫째 딸아이와의 관계에서 깨우친 것을 적용시키고자 한 부분도 있었지만 중학생 아들은 그야말로 딴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불통이라고 하면 맞을는지……. 아예 옆집 아들 보듯 하지 않으면 화병에 걸려 제 명에 못 살 것만 같았다. 따라서 기대를 ‘0’으로 내려놓은 상태에서 아이를 대하곤 했다. 물론 엄마로서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기대 ‘0’에서 ‘1’로 조금만 올라가도 간섭한다면서 무척이나 싫어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둘째 녀석은 중1, 중2를 거쳐 지금은 고등학생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는 중3이 되었다. 흔히들 중3이 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정신이 바짝 든다고들 하는데, 어찌 됐든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니 서로 간의 관계라도 틀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이는 아직도 사춘기에서 벗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물론 사춘기 수위가 가장 높았던 중1 때보다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날카롭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되도록 아이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말을 최대한 아끼고 있다. 솔직히 첫째 딸아이의 사춘기와 맞닥뜨렸을 땐 마음을 내려놓겠다고 수차례 다짐을 했지만 처음엔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단지 노력만 하고 있었을 뿐,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둘째 녀석을 대할 때는 경험에 의한 노하우가 생겨서인지 아니면 완전히 지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기대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편하게 내 일도 할 수 있었고, 시험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도 전혀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예컨대, 시험 기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공부는 뒤로 한 채 게임에만 열중하는 자식, 그리고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를 한번 생각해 보았는가! 솔직히 지금으로선 그 무엇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고 싶었던 게 컸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아이를 향한 기대치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에서 아이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5일간의 긴 시험기간에 돌입했다. 


 사실상 코로나로 인한 집콕 생활에다가 약 1년 동안 학원도 쉬었고, 중2 사춘기에, 시험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게임에만 열중하는 둘째 녀석에게 당연히 시험 점수에 대한 기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첫 시험이 시작되었고, 거리두기로 인해 하루에 두 과목씩, 5일에 걸쳐 드디어 시험이 끝이 났다. 정말이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결과 역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점수가 훨씬 높게 나온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대를 전혀 안 한 탓인지 부모로서 그 기쁨은 굉장히 컸다. 그때 알았다. 기대치가 내려가면 반대로 기쁨은 올라간다는 사실을.


 기대한다는 것! 물론 기대한 만큼 만족함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내가 기대한 만큼의 만족을 주지는 않는다. 기대는 결국 스스로에게나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게 되어 있고, 그 기대에 못 미칠 경우엔 실망을 하게 되고, 그러한 실망은 곧 원망으로 바뀌어 서로 간의 관계에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그래서 난 “기대할게요.”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기대한다는 말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대방의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그토록 믿었던 사람이 자신감 넘쳐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은 또 그게 전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어찌 됐건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간에 있어서 부담이 없을 때 좋은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과한 기대나 쓸 데 없는 기대는 가능한 한 자제하는 것이 그나마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방을 향한 부담스러운 기대보다는 그냥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편안함! 그게 바로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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