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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아코 보아포, 경주우양미술관 전시후기

I Have Been Here Before

by 무드온라이프

1. 도전으로 향한 발걸음


“쉬운 일은 싫다.
쉬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의 인터뷰영상에서 들은 이 한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단순한 고백을 넘어 예술가로서의 태도이자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 말을 떠올리며 경주 우양미술관으로 향했다.

우양미술관 외벽에 걸린 두 전시 배너. 붉은 선율과 청록의 대비 속에서, 두 작가의 에너지가 교차한다.


경주는 요즘, 예술의 도시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대릉의 전경을 품은 오아르미술관이 개관하고,

고요한 풍경 속에 미술관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 중심에 선 우양미술관에서 아모아코 보아포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 제목은 「I Have Been Here Before」- 나는 여기와 본 적이 있다.

그는 “처음 방문이지만,

이미 자신의 작품이 사랑받고 있는 곳이기에

마음으로는 다녀간 곳 같다”라고 말했다.



2. 색과 공기의 리듬 속으로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붉은 흙을 연상하는 벽면, 높은 천창의 자연광,
그리고 아프리카 전통 자수 패턴이 맞닿은 공간은
빛과 색의 리듬으로 나를 감쌌다.


오래전 아프리카를 방문해서 처음 접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뜨거운 흙바람, 밝은 웃음, 붉은 대지의 냄새 —
모두 색과 패턴 속에 살아 있었다.

아모아코 보아포 전시 전경, 자수 패턴 벽면과 붉은 벽이 교차하며 따뜻한 빛이 비치는 공간.
경주 우양미술관 전시실, 천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 아래 인물 초상들이 걸린 공간


이곳은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기억의 대륙으로 건너가는 문’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청아한 음색의 스와힐리 노래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잠시 그가 보았던 세계를 함께 바라보았다.



3. 응시하는 얼굴들


보아포의 그림 속 인물들은 강렬한 집중감으로 시선을 붙잡는다.
근접한 인물, 과감히 절제된 배경, 섬세한 질감이 화면을 채운다.
그 안에서 오직 인물의 시선만이 남는다.


반복된 패턴의 옷과 단정한 자세가 보아포 특유의 응시를 담고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얼굴, 그 안에 담긴 고요한 자신감.


그들의 시선은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존재의 선언이다.


“흑인의 정체성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 이유는 없다.”



배경의 단순함 속에서 오히려 내면의 깊이가 드러난다.
그 강렬한 시선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을 응시하는 보아포자화상. 정지된 포즈의 시선과 단순한 배경이 강렬한 몰입으로 이끈다.


나는 응시하리라.

그 고요한 자신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4. 단순함이 만드는 깊이


자신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도구로도 쓰는
핑거페인팅(finger painting)기법으로 쌓아 올린 질감,
살아 있는 피부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보아포에게 예술은 순환하는 에너지다.


“나는 주는 것이 되돌아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것을
나도 사람들에게 한다.”



주는 것이 되돌아오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는 좋은 에너지를 작품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의 좋은 에너지를 받은 사람들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자화상이 많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첫 번째는 자기애(self love)이지만

누군가 본인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도 어느새 설득이 되고,

그래서 자신의 그림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보아포의 그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닮았다.

그렇기에 그의 인물들은 모두 살아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품고, 누군가를 응시하며,

우리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5. 예술이 머무는 방, 파빌리온


전시의 마지막 공간.
건축가 글렌 드로쉬(Glenn Drosche)가 설계한 파빌리온은
관람객이 보아포의 색과 질감을 천천히 느끼며,
그의 작품이 머무는 시간을 충분히 경험하도록 고안된 공간이었다.


‘예술이 머무는 방’이라 불리는 이 파빌리온에는
엄숙하리만큼 조용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모두 따뜻한 적송으로 감싸인 공간 속에서
그의 자화상은 온기와 냉기를 절묘하게 유지하며
공간 전체의 긴장감을 완성하고 있었다.


높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아프리카 자수 문양을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비추고,
그 빛의 결이 한옥의 고요함과 이국의 색을 동시에 품었다.


나는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아,
손끝으로는 따뜻한 마루의 온기를 느끼며
빛을 머금은 아프리카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회화와 건축이 맞닿은 보아포의 온기가 있었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만난 보아포의 전시는,
이 따뜻한 파빌리온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전통이 하나의 예술로 이어지고 있었다.



보아포의 파빌리온. 한국과 가나의 전통이 접목되어 이국적이면서 편안한 공간. 보아포의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


6. 도전의 시작, 아크라


아크라는 내게 꿈꿀 수 있는 빈 캔버스와 같아요.


보아포가 태어난 아크라(Accra)는 예술의 중심무대가 아니다.
갤러리도, 후원도,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이 도시는, ‘비어 있는 캔버스’였다.

그는 완벽한 조건 대신, 도전이 가능한 불완전함을 택했다.

보아포의 도전, 가나의 수도 아크라. 출처: 롱테이크 영상캡쳐


준비되지 않은 곳처럼 보이는 아크라에서

새로운 색이 태어나고,

예술은 스스로를 확장했다.


아크라는 그렇게, 그의 도전이 시작된 도시이자
예술이 ‘살아 있는 일상’이 되는 실험의 무대였다.



7. 마무리하며


이번 전시는 내 안의 편견을 마주하게 한 시간이었다.

흑인 화가로는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만 떠올렸던 나에게
보아포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남겼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그 속에서 예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보았다.

도전이 사람들의 삶에 에너지로 되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자리에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삶의 예술가일 것이다.


나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 커다란 선물이자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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