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공간이 문화를 품다
문이 없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오고,
바닥에 놓인 사인이 이곳의 입구 역할을 한다.
‘재생과 친환경을 추구하는 문화공장 F1963’이라는 문구가 적힌 낮은 사인이, 조용히 이 공간의 철학을 전한다. 이곳은 1963년부터 2008년까지 45년간 와이어로프를 생산하던 고려제강 공장이었던 자리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공장은 문을 닫게 되었고, 방치되었던 곳인 2016년 부산비엔날레를 계기로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과거의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던 철제 구조물은
이제 부드러운 곡선과 흰색의 메탈 외피로 다시 태어났다.
견고하고 차가웠던 산업의 재료가
빛과 그림자를 머금은 유연한 표면으로 바뀌며,
이곳이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닌 시간의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입구 옆에는 녹슨 철판 표지판이 서 있다.
예스 24 중고서점, 테라로사 커피, 국제갤러리 부산, 금난새 뮤직센터까지 이 안에는 예술과 일상이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산업의 그릇에 문화를 담아낸 공간이다.
흰색의 메탈 외피를 배경으로 영국의 미술가 줄리언 오피(Julian Opie)의 디지털 아트작품이 시선을 끈다.
기계적 반복의 리듬 속에 움직이는 인물 형상은 산업의 시대와 예술의 시대가 공존함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공장의 외벽 위에서 ‘노동의 리듬’을 ‘예술의 리듬’으로 바꾸어 놓는다.
오른편으로는 대나무숲이 펼쳐진다.
‘맹종죽 숲·소리길’이라 불리는 이 정원은
공장 바닥의 콘크리트를 잘라 조성하고 그 위에 대나무를 심어 만든 산책로이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 잎이 서로 부딪히며 미세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과거의 기계음 대신, 지금은 자연의 숨결로 채워진다.
이곳에는 죽순이 자라나고 있는데 처음으로 그렇게 큰 죽순을 보았다.
한때 쇠와 전선이 오가던 이 자리에
이제는 바람과 빛, 그리고 사람의 발자국이 머문다.
시간의 결이 바뀐 것이다.
F1963의 정원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과거의 산업이 자연으로 환원되는 시간의 통로이다.
도시재생 공간을 여러 곳에서 보아왔지만, F1963은 조금 달랐다.
이곳은 단순히 과거 공장의 흔적을 남긴 것이 아니라,
제강공장이었던 원래의 에너지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구조물의 강철, 녹슨 흔적, 그리고 낡은 콘크리트, 벗겨진 페인트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차곡차곡 쌓아온 산업의 숨결이 느껴졌다.
테라로사 옆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중정에는
낮은 천막이 햇살을 부드럽게 걸러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어 잠시 앉아 햇살을 즐겼다.
눈을 돌리니 주위엔 철제 기둥과 오래된 벽면,
그리고 녹슨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어
마치 철강공장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짧은 휴식이었지만, 긴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공장의 시간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쌓은 공간.
이곳은 단순한 복합문화공간이 아니었다.
커피 향과 대화, 그리고 바람이 머무는 이 중정에는
시간이 쌓여 만들어낸 장소성의 진지함이 있다.
모든 요소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품으며, 미래를 암시한다.
가장 먼저 마주한 곳은 예스 24 중고서점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높은 서가와 드러난 철제 보 구조는
공장의 리듬을 품은 채,
이제는 활자의 바다로 변모해 있었다.
낡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 쌓인 책 더미는
과거의 ‘생산’이 ‘사유’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서점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인쇄기가 놓여 있었다.
종이를 토해내던 기계는 이제 더 이상 돌아가지 않지만,
그 위로 흐르는 긴 종이는 여전히 이야기를 인쇄하듯 펼쳐져 있었다.
본래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시되어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벽면에는 오래된 창틀과 문짝이 설치미술처럼 나란히 걸려 있었고,
각각의 창과 문은 마치 시간의 단면을 엮어놓은 듯했다.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붉은 벤치가 놓여 있었다.
벽을 따라 자라난 담쟁이덩굴과
차가운 회색 콘크리트.
강렬하면서도 담백한 색들의 조합은 이 공간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었다.
‘산업의 회색’ 위에 ‘일상의 붉은 온기’와 푸른 생명력'이 더해진 자리였다.
6월 초, 날씨가 참 좋았다.
F1963의 국제갤러리에 부산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면의 강렬한 색이었다.
보라, 청록, 분홍, 오렌지—
서로 다른 색이 리듬을 타듯 맞물리며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천장은 옛 공장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거칠게 남은 철골과 현대미술의 세련된 색채가 공존하며,
이 공간이 ‘과거의 흔적 위에 선 현재’ 임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스크린 속 연주자들은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지만,
전시장 전체에선 마치 하나의 곡처럼 들려왔다.
색과 음악과 움직임이 동시에 하나로 전해지는 그 순간,
전시가 아닌 콘서트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F1963의 한쪽에는 금난새뮤직센터(GMC)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부산 출신 지휘자 금난새가 고향의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
소통하기 위해 만든 열린 음악 공간이다.
그는 개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나의 음악 둥지가 아니라,
부산의 젊은 음악가들과 소통하기 위한 열린 공간입니다.”
공장의 흔적이 남은 철골 구조 안에서
음악은 또 다른 언어가 되어 울린다.
F1963의 재생된 시간 위로
이제는 ‘소리의 풍경’이 흐르고 있었다.
햇살 좋은 오후
메탈 구조물의 틈 사이로 대나무숲이 들어왔다.
빛이 스며들고 바람이 지나가며, 산업의 흔적과 자연의 결이 조용히 겹쳐졌다.
메탈 벽은 대나무숲을 감싸는 액자처럼,
두 세계의 시간을 한 장면 속에 담아내고 있었다.
F1963은 복합문화공간으로도 손색이 없지만,
그보다 더 큰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고려제강’이라는 산업의 서사를 안고,
쇠의 기억 위에 새로운 문화를 세운 공간.
이곳은 도시의 시간과 인간의 감각이
함께 재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가 있기까지,
불과 몇십 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 짧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도시는 여전히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생로병사의 순환을 거슬러
도시는 다시 태어남을 보여주는 F1963.
어떤 변화가 다가올지,
아직 그려지지 않는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