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권위, 절제된 호사
부암동 서울미술관을 통해 마주한 석파정.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벼르다 이번 환기미술관과 함께 들렀다.
도심의 끝자락이라기엔, 여전히 중심에 가까운 곳.
자연을 끌어안은 이 별서는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권력과 미의식이 맞닿았던 자리였다.
고요 속에서 누리던 여유,
그것은 오직 소수에게만 허락된 세계였다.
인왕산 자락의 물과 바람,
바위의 결을 따라 자리한 석파정.
자연을 곁에 두는 일은, 그 시대엔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자연을 지배하기보다, 그 안에서 품격과 절제의 미학을 지켜왔다.
석파정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까닭은, 화려함이 아닌 절제에서 피어난 미학 때문일 것이다.
석파정의 한옥은 주변의 자연보다 오히려 더 담백하다.
자신의 자리를 아는 듯, 사랑채와 안채는 단정히 배치되어 있었다.
그 질서 속엔 조용한 품격이 깃들어 있다.
사랑채의 창 너머로 보이던 한 점의 달항아리,
그것은 권세보다 더 깊은 고요의 권위를 말하고 있었다.
석파정의 아름다움은 달항아리의 미감처럼,
드러내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부러움과 사유의 경계에서 그들의 세상은 멀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부러움이 스쳤다.
자연을 이토록 가까이 두고, 세상의 번다함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건 오래전부터 내가 꿈꾸던 여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는 단순한 향유를 넘어선 어떤 품격이 있었다.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다만 곁에 두려는 마음.
그 절제된 시선이야말로, 석파정이 지금까지 품어온 진짜 힘이었다.
안채의 솟을 문을 나서면,
대지의 경사면을 따라 유려하게 앉은 담장과 지붕이 시선을 이끈다.
인위적인 곡선 하나 없이, 땅의 결을 따라 스스로 자리를 찾은 듯한 모습.
석파정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이 ‘지형에 순응하는 질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석파정은 그저 물 좋고 풍광 좋은 곳이 아니다.
이제는 누구나 걸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 고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한때 권세의 상징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사유하는 사람들의 안식처로
오래도록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초가을의 볕 좋은 날,
석파정을 거닐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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