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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 고요 속의 호사

소수의 권위, 절제된 호사

by 무드온라이프


들어가며


부암동 서울미술관을 통해 마주한 석파정.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벼르다 이번 환기미술관과 함께 들렀다.


도심의 끝자락이라기엔, 여전히 중심에 가까운 곳.
자연을 끌어안은 이 별서는 단순한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권력과 미의식이 맞닿았던 자리였다.


고요 속에서 누리던 여유,
그것은 오직 소수에게만 허락된 세계였다.


석파정 사랑채 앞을 지키는 오래된 소나무. 가지를 낮게 드리운 채, 바위와 지붕,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품어 안고 서 있다. 절제된 한옥의 미학이 이 소나무의 곡선과 함께 완성된다


자연을 누릴 수 있었던 소수의 권위


인왕산 자락의 물과 바람,

바위의 결을 따라 자리한 석파정.

자연을 곁에 두는 일은, 그 시대엔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자연을 지배하기보다, 그 안에서 품격과 절제의 미학을 지켜왔다.

석파정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까닭은, 화려함이 아닌 절제에서 피어난 미학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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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돌담을 끼고 안채로 오르는 계단. 우: 채색된 육각형무늬의 단아한 담장과 열려진 창문으로 보이는 사랑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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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두 채 사이, 세월이 스민 좁은 길. 닫힌 문 뒤에도 누군가의 숨결이 머문다. 우: 사랑채 툇마루 위의 석호 한 마리, 위엄보다 미소로 집을 지키는 수호의 짐승.
단정한 기둥과 여백, 절제된 품격이 머물던 안채


절제 속에 깃든 미의식


석파정의 한옥은 주변의 자연보다 오히려 더 담백하다.
자신의 자리를 아는 듯, 사랑채와 안채는 단정히 배치되어 있었다.
그 질서 속엔 조용한 품격이 깃들어 있다.


석파정 별서의 창가에 놓인 달항아리. 창문 너머로 겹겹의 지붕선과 인왕산의 능선이 이어지며, 고요한 여백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전한다.


사랑채의 창 너머로 보이던 한 점의 달항아리,
그것은 권세보다 더 깊은 고요의 권위를 말하고 있었다.
석파정의 아름다움은 달항아리의 미감처럼,
드러내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부러움과 사유의 경계에서


석파정_정자.jpg
석파정_정자_창가의_풍경.jpg
석파정(石坡亭) 전경과 정자 안에서 바라본 계곡 풍경. 인왕산의 바위와 물길 위에 세워진 정자는 자연을 벗삼되, 결코 지배하지 않는 절제의 미학을 품고 있다.


부러움과 사유의 경계에서 그들의 세상은 멀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부러움이 스쳤다.

자연을 이토록 가까이 두고, 세상의 번다함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건 오래전부터 내가 꿈꾸던 여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는 단순한 향유를 넘어선 어떤 품격이 있었다.


인왕산의 바위 절벽 아래 자리한 너럭바위. 자연의 스케일이 공간의 주인이 되는 지점, 석파정의 품격은 이 압도적인 자연과의 공존에서 비롯된다.
거대한 바위 아래, 사람들이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 거대한 자연 앞에 남겨진 간절함은 경건하고도 다정하게 느껴진다.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다만 곁에 두려는 마음.

그 절제된 시선이야말로, 석파정이 지금까지 품어온 진짜 힘이었다.


안채의 솟을 문을 나서면,

대지의 경사면을 따라 유려하게 앉은 담장과 지붕이 시선을 이끈다.

인위적인 곡선 하나 없이, 땅의 결을 따라 스스로 자리를 찾은 듯한 모습.

석파정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이 ‘지형에 순응하는 질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안채 솟을대문을 나오면, 경사 대지를 따라 이어지는 돌담과 지붕 사이로 붉은색·노란색·파란색 벤치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절제된 한옥의 질서 속에 현대적 색이 스며들며, 고요한 풍경


석파정, 지금의 우리에게


석파정은 그저 물 좋고 풍광 좋은 곳이 아니다.

이제는 누구나 걸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 고요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한때 권세의 상징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사유하는 사람들의 안식처로
오래도록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초가을의 볕 좋은 날,

석파정을 거닐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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