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은 지금도 계속된다
1970년대 낙동강가에서 시작된 이강소의 실험은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이번 대구미술관 회고전 〈곡수지유: 실험은 계속된다〉는
그가 반세기 동안 탐구해 온 ‘흐름’과 ‘실험정신’을 한 자리에서 보여준다.
‘곡수지유(曲水之遊)’는 물이 굽이쳐 흐르며 삶의 순간과 공간, 시간을 이어주는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이미지다.
이강소는 이 흐름을 자신의 예술 안으로 가져와,
강물·바람·모래·날씨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연의 리듬을 곧 예술의 언어로 삼았다.
그의 작업은 물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남기는 흔적과 기운을 따라가는 방식에 가까웠다.
새로운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그는 언제나 ‘실험’이라는 태도를 잃지 않았고, 그 흐름은 2025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전시는 그 여정의 기록이자, 이강소 예술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강줄기다.
주소 없는 작가, 예술의 새 길을 열다
한국 현대미술의 초창기는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일보다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시대였다.
교육도, 제도도, 감각도 서구 중심으로 짜여 있었고 우리는 그 구조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할지 고민하기보다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혼돈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시대 속에서 자기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버텨낸 작가들의 목소리는 지금 다시 보면 더 크게,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강소는 그 시절을 통과해 온 대표적인 이름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그의 이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내 시선은 주로 해외의 유명 작가들에게 더 크게 쏠려 있었고,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를 가리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혼돈의 시대를 버텨내며, 보이지 않는 길을 스스로 만들었던 사람들.
그들이 남긴 길 위에 지금의 한국 현대미술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강소 전시 앞에서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가 만들어 놓은 ‘길의 흔적’을 따라 걸어보기 위해 대구미술관 문을 천천히 열었다.
이강소는 대구에서 태어나 조부의 서예를 곁에서 보며 자연스럽게 예술의 감각을 받아들였다.
글씨와 선, 종이와 먹의 세계는 내면에 조용히 뿌리내린 감각적 기반이 되었고, 예술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한 첫 환경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또래들과 만든 청운회(靑雲會)에서 전시를 열고, 선생님들과 이론적 대화를 나눌 만큼 사고가 빠르게 확장되던 시기였다.
재미있게도 한때는 이과학생이었다.
세계가 궁금했고, 더 넓은 바다를 알고 싶었다.
그러다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1960–70년대는 서구 근대미술이 기준이던 시대였다.
작품을 이해하는 틀도, 비평의 언어도, 교육 제도도 모두 서구 중심이었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자연스럽게 서구의 감각을 ‘정답’처럼 받아들였고, 그 흐름을 통과해야만 미술가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강소는 그 안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어색한 틈을 느꼈다.
서구의 방식을 배우고 실험하면서도 그 구조 속에 자신을 온전히 놓을 수 없었다.
그는 훗날 그 시절의 자신을
'예술가로서 주소 없는 작가'라고 표현했다.
정체성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거대한 근대의 파도 속을 떠다니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결국 그 어색한 틈의 정체가
‘서구를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역사’로 향한다.
역사라는 말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원을 찾는 행위였다.
동양의 사유, 선과 먹, 여백의 감각, 그리고 오래된 붓의 세계는 그가 서구 중심의 미술에서 느꼈던 어색함을 채워주는 또 다른 언어였다.
그는 서구의 구조를 배우되, 자신의 근원과 감각에 맞는 동양적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작업은 단순한 ‘추상회화’의 범주를 벗어나 자연의 질서, 시간의 흐름, 존재의 흔적을 탐구하는 고유의 세계로 확장된다.
이강소의 한 획은 단번에 그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반복과 버려진 시도를 통과해 남은 순간의 에너지다.
긴 서예 붓 끝에 실린 압력과 속도, 떨림, 먹의 번짐까지 몸이 흐른 방향 그대로 화면에 남겨진 흔적이다.
그에게 붓은 표현 방식의 도구를 넘어,
사유가 지나가는 하나의 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일필휘지는 완성의 제스처가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는 힘의 흐름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강소의 회화는 언제나 한 장면을 ‘정밀하게 재현’하기보다, 세계가 스쳐 지나가는 기운과 흐름을 포착하려는 쪽에 가깝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한 번에 휘갈긴 듯한 붓결, 바람처럼 얇게 번진 회색의 결들, 불현듯 스며드는 노란빛과 초록빛은 구체적 풍경을 묘사하기보다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아둔 흔적에 가깝다.
화면 아래 조용히 놓인 작은 배 한 척.
이 작은 배는 단순한 형상이 아니다.
작가와 관람자를 잇는 매개체, 경계를 건너는 소통의 통로, 머물지 않고 떠다니는 세계의 부유(浮遊)를 상징한다.
추상적인 화면에 이 한 줄이 놓이는 순간,
작품은 방향을 갖게 되고 이강소 회화만의 감각이 또렷해진다.
미학자 최광진은
“이강소가 서구의 추상표현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체적 이미지’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완전히 비정형의 화면에 오리나 배 같은 희미한 기호가 들어오면서, 그의 회화는 추상 너머의 동양적 문인화의 흐름에 가까워진 것이다.
‘곡수지유(曲水之遊)’는
굽이진 물길 위에 술잔을 띄워 보내고,
그 잔이 멈춘 자리의 사람이 시를 짓던 오래된 풍류다.
자연의 흐름을 억지로 바꾸지 않은 채,
흐름이 허락하는 순간에 사유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청명’은 색을 절제한 흑백의 결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혼탁함을 걷어내고 맑고 투명한 정신세계를 담고자 하였다.
오리, 집, 배와 같은 친숙한 이미지들은 기호처럼 간결해지고 흔적처럼 가벼워졌다.
인위적인 형상 없이, 남아 있는 것은 ‘흐름 그 자체’를 응시하는 감각이다.
이강소가 자연의 기세(氣勢)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절제된 장면이다.
Serenity를 ‘청명(淸明)’이라 번역한 것은 단순한 평온이 아니라, 탁함이 걷히며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는 고요함을 ‘상태’가 아닌 마음의 밝음으로 이해하는 동양적 사고에 가깝다.
〈Serenity–181698〉의 화면 아래에는 작은 배 하나가 조용히 떠 있다. 그 작은 기호 하나가 세계를 ‘물 위의 흐름’으로 전환시키고, 관람자의 시점을 결정한다. 이강소 회화의 공간 감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청명 연작은 인위적 구도가 아니라, 물길을 따라가듯 자연스러운 선의 굽이를 따르고 있다. ‘곡수지유’가 현대적으로 되살아난 순간이다.
‘청명’ 이후, 작가는 어느 순간 “색이 나를 유혹했다”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화면에 색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다.
‘바람이 분다’ 연작에서는
청명의 탁 트인 기운과 청량한 호흡 위에 화사한 색채가 더해지며 새로운 에너지가 피어난다.
2024년부터 시작된 ‘바람이 분다’ 연작은 그의 회화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다.
오랫동안 절제했던 색들이, 마치 “나를 유혹했다”라고 말하듯 화면 안으로 밀려온다.
바람이 분다는 단순한 제목이 아니라, 색채가 불어오는 방향을 가리키는 말처럼 느껴진다.
선은 물길을 따라가듯 자연스러운 힘의 굽이로 화면에 놓인다.
그의 화면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사유가 만나는 그 지점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한 힘을 얻는다.
이강소의 실험정신은 회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조각, 사진, 설치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주체와 객체가 흐릿해진 자리에서, 생명의 선이 조용히 지나갔다.
이 작업은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 소개되었던 퍼포먼스형 설치로, 한국 실험미술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강소는 닭의 다리에 물감이 묻은 끈을 묶고, 닭이 바닥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했다.
닭이 걷고 멈추고 날개를 털어 올리는 순간마다 바닥에는 선이 남았고, 그 우연의 궤적을 그대로 작품으로 삼았다.
작가는 이 실험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꼭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통제와 의도를 최소화한 채, 생명 자체가 남긴 흔적을 회화의 언어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과는 계획된 구성보다, 하나의 생명이 지나간 시간의 기록에 가까웠다.
‘〈Full Moon〉보름’은 제목과 형태가 바로 연결되지 않아 오래 바라보게 된 작품이었다.
보름달이라는 제목과 달리, 화면에는 삼각형과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형태만 남아 있다.
달의 원형을 지우고, 그 구조만 추출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왜 이게 보름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품게 된다.
작가는 완전한 달의 형상을 버리고, 달이 가진 빛의 구조·정적·긴장감 같은 본질만 남기고자 했다.
형태를 없앴을 때 오히려 드러나는 보름의 느낌,
즉 ‘달이 남긴 힘’을 기하학으로 번역한 실험이다.
통로를 지나 메인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용한 압력이 느껴지고, 작품들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고요한 에너지를 내뿜었다.
그 순간 전시감상이 아니라,
웅장한 대자연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바닥의 반사광은 화면의 기운을 한 번 더 번져나가게 하며 공간 전체를 하나의 호흡처럼 느끼게 했다.
거대한 획(筆) 이 흰 벽을 가로지르고, 조각들은 마치 붓질의 파편처럼 바닥 위에 응축되어 있었다.
조각은 단단히 놓여 있으면서도
어딘가로 움직이려는 힘을 머금고 있었다.
회화의 획과 조각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 결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조각에서의 ‘던지기’는 그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흙을 빚어 들고 있다가 바닥으로 던지는 순간,
작품은 이미 그의 의지에서 벗어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다.
시간이 스치며 남긴 흔적,
그 흔적이 보여주는 존재의 유한성이다.
그래서 그의 실험은 계속된다.
형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강렬한 전시에 비해 ‘청명(淸明)’ 시리즈는 훨씬 절제된 모습이었다.
거대한 붓질이 휘몰아친 전시실에서 한 걸음 옮기면, 화면 가득 번진 은은한 흰 기운과 느리고 고요한 선이 맞아준다.
작가는 형태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화면의 흔들림과 여백의 떨림만으로 ‘기운’이 어떻게 지나가는가를 보여준다.
‘허(虛)’ 연작은 이강소 회화가 도달한 가장 절제된 지점이다.
거의 비워진 화면 위에 단 한 번의 획이 놓이고,
그 선은 지나간 붓질이 아니라 기세(勢)의 흔적이 된다.
이강소가 말하는 ‘허(虛)’는 공허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나, 그 안에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
비워두었기에 오히려 더 뚜렷해지는 힘,
여백 속에서 천천히 번져 나오는 기운이 응축되어 있다.
〈허–11160〉 앞에 서면
가장 먼저 고요가 다가오지만,
그 고요는 곧 화면 전체를 세우는 힘으로 바뀐다.
이 작품은 그리기보다, 한 번의 기운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에 가깝다.
그의 퍼포먼스는 또 하나의 실험이었다.
붓 대신 몸이 움직이고, 움직임은 곧 흔적으로 남았다.
몸에 페인팅을 한 후, 몸을 천에 닦아낸다.
순간의 동작들이 천과 사진 위에 차곡차곡 쌓이며 그 자신을 비추는 또 다른 자화(自畵)가 되었다.
‘소멸’이라는 이름은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이강소의 첫 개인전 제목이다.
당시 그는 회화나 조각보다 사라지는 순간들에 주목했다.
사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쓰임이 끝난 사물, 흔적만 남은 풍경들.
그는 이 모두를 하나의 ‘장면’으로 포착하며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에 드러나는 시간의 층위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이번 전시(어미홀 재구성)는 그 초기 문제의식을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
낡은 테이블과 벤치, 주전자와 사발, 흐릿하게 찍힌 사진들..
이것들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한 시대의 생활과 관계, 온기와 소리까지 사라진 뒤 남은 자리를 상징한다.
‘소멸’은 결국 사라짐을 슬퍼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라진 이후에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부재가 남기는 기척, 비어 있는 자리의 기억,
그 묵묵한 잔향이 이강소가 말한 ‘소멸’의 본질이다.
한국의 예술에는 언제나 단단한 결이 있다고 느낀다.
전쟁과 가난, 혼돈을 지나온 시간들은
상흔이 되어 자연스레 작품의 깊이가 되었다.
그런 작업들을 마주할 때면
어떤 거창한 언어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밀려온다.
그 힘이 앞으로 어떤 길을 열어갈지,
조용하지만 확실한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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