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레 May 04. 2020

1. 운명, 고양이, 빛과 미래의 이중성.

어떤 이는 말한다. 사주팔자는 타고나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 다른 이는 말한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다. 어느 게 맞는 것일까? 어쩌면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보다는 자신의 삶, 미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만에 하나 이미 쓰여 있는 운명이라도 노력에 따라 고쳐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이 있다. 물론, 운명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에 대해 자신만의 뚜렷한 관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운명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해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에게 운명은 가변적이다. 이미 결정되어 인간은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이미 운명은 고정 불변이다. 대학교 전공 수업을 들으며 운명도 이중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빛의 이중성에 대한 수업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빛의 실체에 대한 이론 수업이었다. 빛은 특정한 현상에 대해 입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실험을 통해 빛은 알갱이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입자성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는 빛이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파동성을 적용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운명을 빛에 대입시킨다면 가변성(예를 들어 파동성)이나 고정 불변성(입자성) 모두 운명의 성질이다. 중요한 것은 관찰자가 어떠한 성질에 따라 현상을 이해하느냐 이다. 


사실 운명이 정해져 있다, 아니다는 논쟁은 소모적이다. 운명, 즉 미래를 들여다볼 수도 없고, 들여다보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미래를 들여다 보고자 하는 순간 그 미래는 변한다. 적어도 들여다보려고 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고정된 미래는 없다.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과학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박스 안에 갇혀 있는 고양이. 우리는 생사를 모른다. 상자를 열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는 행위가 고양이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관찰자가 어떤 현상의 측정을 위해 개입하는 것 자체가 결과에 귀결된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을 배우며 미래도 이와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미래는 확률이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기보다는, 미래에 대해 예견하려고 하기보다는 현재의 나, 지금 스스로의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지금의 나, 현재의 나는 통제할 수 있다. ‘나’라는 통제 가능한 변수로 현재에 집중하여, 변화 가능한 ‘미래’를 상수로서 고정시켜 보는 것이다. 현재의 노력을 통해 시간이 흐른 후 도출하고자 하는 바, 즉 고정된 결과 값을 얻고자 노력하는 게 가치 있는 행동이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그려왔던 나의 미래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실현 가능한지 조차 알 수 없는 꿈 그 자체였다. 당시에 처한 환경에서 꿈의 실현은 요원해 보였다.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면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조차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동경하는 분야와의 연결 고리가 없었고, 다른 대륙에 건너가야 그나마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기에 다다를 수 없는 계단의 꼭대기에 나의 꿈이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개척할 수 있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허황돼 보이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할 수 있었다. 


꿈을 크게 가지라고 했다. 나의 롤 모델은 기술의 한계로 상상력을 제한하지 말라고 했다. 현실에 처한 제약으로 꿈을 작게 꿀 필요가 없었다. 주위의 몇몇 분들은 걱정과 우려로 무모한 결정을 말리려고 하셨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되뇌었던 문장이 있다. 나의 꿈을 구체화하는 시기에 우연히 읽게 된 어느 판타지 소설의 문구였다.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나의 모토가 되었던 말이다. “신들이 저울을 만들었다면, 나는 저울눈을 속이겠다!” 이영도 작가의 소설 속 마법사의 신념이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곱씹는다. 설사 운명의 무게가 정해져 있더라도, 나는 그 무게를 속여서라도 꿈을 실현시킬 것이다. 


미래는 개척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미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내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꿈,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마음가짐이었다. 결정적인 시기에 나아갈 바를 명확히 해 주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말을 할 때 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다시 일어서 부딪히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이 험난하더라도 내 손으로 개척해 낼 것이리라. 그렇게 첫 번째 도전을 시작하였다. 어렵게 입사한 대기업에서 퇴사를 하며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의 첫 발을 내디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