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퇴원을 하며 아버지의 짐을 정리할 때 노란 메모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병실에서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무료해 하실까봐 붓 글씨 연습을 위해 사다 드린 메모장이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붓펜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을 테다. 황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어 놓으신 안락사라는 단어로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나 큰아버지 보다 더 오래 사셨다고 했었다. 손주까지 봤으니 더 여한이 없다고 하셨다. 완치의 희망은 이미 떠나 보내셨었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다. 입원을 강요한 내가 후회스럽다. 아버지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집에서 보내고 싶어하셨다.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을 하며 황달 수치를 어느 정도 낮추었다. A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수술 날짜가 확정되기 만을 고대했다. 아버지에게 인고의 시간을 강요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술일이 잡혔고 주치의와 면담을 가졌다.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같이 얘기를 들었다. 주치의는 결정을 종용했다. 수술에 대한 부작용을 늘어 놓으며 수술 경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사망 가능성을 강조하며 절망의 단어들을 늘어 놓았다. 이제 와서 수술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에둘러 말했다.
아버지는 수술을 거부하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충분히 오래사셨다고 했다. 손주를 봤으니 되었다고 하셨다. 독신주의를 고집하던 아들이 늦게나마 결혼을 해서 다행이다. 집에 갈 수 있어서 안도하셨을까? 생을 정리할 수 있는 1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가족의 곁에서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을 박탈했다.
고향으로 내려와 어느 한 종합병원에서 담도와 스텐트 제거 수술을 받았다. 제거된 부위의 조직 검사 결과 말단에서 암 세포가 발견되었다. 간으로의 전이를 의미했다. 아버지는 담도암 판정 1여년이 지난 시점에 생을 마감하셨다. 상태가 악화되어 응급실에 호송되었을 때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셨다. 응급실에서 병실로 올라가시는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병실에서 결국 의식을 잃으셨고 응급조치가 취해졌다. 연명 치료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혈압상승제 사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보호자 결정이 필요했다. 나는 반대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면 내가 되는게 낫다. 결정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고 가면 된다. 암에 대한 완치의 가망성이 없다면 보내 드리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