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amec Caverns,
Sullivan, MO
평온했다. 아늑한 숲 속에 투명한 강물이 잔잔히 흐르고, 파란 하늘의 솜사탕 구름도 느릿느릿 흘러가던 날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항상 두 팔 벌려 우릴 반겨주는 자연으로 가는 길이 제일 쉬웠다. 세상은 이런저런 이유의 소음으로 공허했지만, 메라멕 강이 흐르는 계곡에는 오직 존재의 이유만이 가득했다.
제시 제임스(Jesse James)라는 사람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미주리 출신의 전설적인 무법자였다. 많은 살인을 저질렀고 열차, 은행 강도를 일삼았다. 일찍이 현상범 수배가 붙었고, 그는 늘 도망 다녔다. 경찰을 피해 은신한 적이 있다고 전해지는 동굴은, 그가 숨었던 곳이라 홍보하며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다. 평범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동료에게 총살될 때까지, 그의 35년 인생은 21세기에도 계속 각본, 편집되어 재탄생하고 있었다.
입장표를 끊고 제시의 은신처, 메라멕 동굴로 들어가니 가이드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 시작 몇 달 만에 벌써 대면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울에 막 올라온 시골사람처럼 어색함을 애써 감추며 다른 사람들과 투어를 시작했다.
키가 크고 날렵해 보이는 가이드와 인사를 나눴다. 그의 안경 너머에서 혜성처럼 반짝이는 눈빛은, 동굴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알려줄 요량이었다. 낮고 차분한 그의 목소리는 전문적인 성우 같았다. 나는 6살 아이의 호기심으로 내가 듣는 모든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리라,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다짐을 했다.
본격적으로 동굴 속에 들어가자, 그의 물 흐르듯 막힘없는 이야기는 마스크의 연속적인 블로킹에 맥없이 힘을 잃었고, 광활한 메아리 속에서 연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나의 귀는 무기력해졌다. 신호를 열심히 쫓다가 멈춰버린 채 옥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옛날 티브이 안테나처럼. 가이드의 불타는 열정에 대응할 별 다른 도리가 없는 와중에, 영어 흘려듣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듣기를 멈추자, 보이기 시작했다.
마술인 줄 알았다. 내 착각인 줄 알았다. 피부에 닿는 공기에 수분감이 충만하고 온몸으로 물이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물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다. 물의 실체는 내가 핸드폰을 손으로 잡듯이 그렇게 잡히지 않았다.
반은 진짜 동굴 벽이었고, 나머지 반은 물에 비친 모습이었다. 맑고 깨끗한 물은 동굴의 티끌 하나까지도 섬세하게 비쳐줄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물 그림자는 초고화질 티브이 같이 선명했다. 마트에 전시된 티브이 앞에서 너무나 선명한 실사 영상을 보며 빨려 들어갔던 때가 생각났다.
물속에 손을 넣어서 찰랑거리고 싶어졌다. 이 빈틈없는 데칼코마니를 흔들어 흩트리고 싶어졌다. 지나친 완벽함이 숨을 멈추게 만들었다. 나의 괜한 심술에 보란 듯이, 물은 집요하고 끈기 있게 고요했다. 차분한 물의 표면이 샘이 났다. 거울 같은 물 앞에 서 있는 벽의 덤덤함이, 나는 샘이 났다.
이렇게 진실된 거울 앞에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기본 카메라앱은 애써 외면하며 필터가 다양한 다른 앱을 기웃거렸던 나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처럼 나오면 안 되고, 딴 사람같이 나와야 잘 나왔다고 만족하게 된 게. 내 안에서 나를 부정했던 시간들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 가난한 내가 거울 뒤에 숨어 있었다. 여러 가지 상처와 오염으로 얼룩진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다. 동굴의 세련되고 품위 있는 물그림자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질투가 나버렸다.
연중 15도를 유지하는 동굴 안에서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낮은 천장에 고드름 같은 종유석이 촘촘히 박혀있고 조명을 받아 황금빛이 났다. 석주로 보이는 굵고 기다란 기둥들은 물속에 잠겨있는 것인지 물 위에서 비친 것인지 헷갈렸다. 수면 위로 그려지는 물동그라미는 유유히 춤을 추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석회 고드름과 물 위에 반사된 그것이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오락실 틀린 그림 찾기의 최고난도 레벨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동굴과 물그림자의 다른 점을 찾아보시오.’ 제한시간 3분. 틀린 그림 찾기의 고수인 나는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어느새 가이드가 저만큼 앞서가고 있으므로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정답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다르다고 생각한 내 마음이
그 다름을 만들어냈다.
조명이 강렬해졌다. 색이 바뀔 때마다 마술을 부리듯 동굴은 변신을 거듭했다. 입을 벌린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는 지옥이 되었다가, 영화 <겨울왕국> 엘사가 만든 차가운 얼음 성의 첨탑이 되기도 했다. 동굴은 전지전능했다. 그 무엇이 될 수 있었고, 동시에 그 무엇이 될 필요가 없었다. 존재로서 완벽했다.
이 화려한 고요함 속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지혜가 솟아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뾰족한 종유석을 너무 많이 봐서 생긴, 단단한 착각이거나. 아무렴 좋았다. 우리는 불꽃놀이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말문을 잃고 바라보았다.
어느덧, 극장같이 넓고 좌석이 줄을 맞춰 놓여 있는 마지막 방에 도착했다.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펼쳐진 약 21m 높이의 초대형 스크린을 보았다. 무대 커튼이라고 불리는 이 벽 위로 오늘 동굴 투어의 피날레, LED 조명 쇼가 시작됐다.
음악이 나오고 God bless America로 시작하는 가사가 흘러나왔다. 조명과 같이 띄워진 영상 속에서, 어린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니고 가족은 행복하게 웃음 지었다. 군인들의 모습이 보이고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함께 미국 국기가 펄럭였다.
God bless America
My home sweet home
멜로디는 고요한 강물처럼 평화로웠고, 가사는 꿈꾸는 듯 아름다웠다. 동굴 안에서 음악은 그 어떤 스피커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웅장하고 깊이 있게 울려 퍼졌다. 담대하면서 툭툭 던지는 울림은 애절했고, 나는 가슴속 저 아래에서 서서히 뭉클해졌다. (제2의 미국 국가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고 2001년에 셀린 디온이 부른 노래를 우리는 듣고 있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 수시로 나왔던 애국가 영상이 생각났다. 동해바다와 백두산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어린 내가 보기에 재미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지만, 마지막 후렴구에서 절정에 치달을 때 나도 모르게 울렁거리곤 했다.
지하에서 가장 위대한 쇼라고 홍보되고 있는 피날레는 끝이 나고, 무대 커튼은 닫혔다. 개인기업이 운영하는 동굴 관광지의 조명 쇼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노래로 이렇게 외국인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을 일인가. 마치 주말 아침 편안한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다가 난데없이 회사에 내던져진 채 심각하게 쌓인 일을 처리하게 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리는 진한 여운을 간직한 채 7층 건물 깊이의 지하 동굴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좀 전에 들은 노래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다시 만난 뜨거운 태양이 반가웠다. 동굴에서 차갑게 식혀진 내 몸은 쏟아지는 햇살에 조금씩 따뜻해졌다.
강가에 앉아서 한국을 생각했다. 단군 건국 이래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애잔함을 떠올렸다. 오천 년 역사동안 끈기 있게 버텨내고 억척같이 살아낸 무수히 많은 한국인을 떠올렸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Pachinko)>에 나오는 선자네 가족을 떠올렸다. 우리의 엄마였고 아빠였고 언니였고 오빠였던 그들을. 그 모질고 끈덕진 시간들을 하루하루 견뎌낸 모두가, 영웅이었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파친코> 첫 문장
강에 비친 하늘의 구름은 물이 흘러가는 대로 넘실거렸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과연 무엇인지, 영웅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묵직한 상념들이 내 속에서 강물처럼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