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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읍시옷 Mar 19. 2024

미나씨, 또 프사 바뀌었네요?

이런 감상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내가 신도 아니고,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하면서 사는 게 사는 거라는 걸 알지만, 나는 실수랑 후회 둘 다 하고 싶지 않다. 어릴 적엔 눈만 감았다 뜨면,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어, 실수를 하더라도 후회 따위를 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아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는 일상을 보냈다.


오히려 후회는 나이를 먹고 나서야 질긴 오징어 다리처럼 삼키지 못하고, 앞니, 어금니로 잘게 잘게 씹다가 결국 통째로 목구멍에 상처를 내며 지나갔다. 이 빌어 쳐 먹을 오징어 다신 먹지 말아야지. 하며 씹다 남은 오징어를 냅다 집어던진다. 오징어를 산 돈이 아까우니 씩씩거리면서 교훈 하나 얻었다고 정신승리를 시작한다. 내 후회들은 이 오징어다리처럼 냄새가 나고, 질기기만 할 뿐이라 다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좋좋소 정승 네트워크의 미나씨는 매사에 부정적이다. 사장이 말만 하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대답하고, 밝게 지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미나씨가 매사에 삐딱하게 된 이유의 시작은 지나간 애인들이다.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다 만나면서 똥인지 된장인지 엄지 손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다 찍어먹고 나서야 '이게 똥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


그때 그 사람이랑 헤어지지 말 걸, 그놈이 아니었다면 회사 동료와 더 친해졌을 텐데, 회사를 관둔다고 말했으면 안 되는데 등등 드라마의 모든 에피소드마다 필연적으로 후회를 마주하며, 카톡의 프사를 바꾼다.


미나씨에게 카톡의 프사를 바꾸는 일은 후회를 지우는 일이었다. 지나간 연인과의 추억을 더 이상 보고 싶지도, 보이고 싶지도 않기에 훔친 물건을 숨기듯 프사를 바꾸기에 급급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치 없는 이 과장님이 미나씨에게 물어본다.


"미나씨, 또 프사 바뀌었네요?"


오지랖이 과하다고 느낀 미나씨는 "아 네.."하며 대꾸를 허공에 날려버린다. 미나씨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관심과 위로는 맞지만 회사 동료의 관심과 위로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본다.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지만 내 옆에 있는 늙탱이 아저씨들보다, 내가 생각했던 운명의 상대만이 나를 이해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미나씨다. 




그렇게 몇 번의 이별을 더 경함하고 난 후 문득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 시작을 찾으려는 미나씨는 큰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그저 평범하고 좋은 연애가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연애도 친구도 가족도 다 거지 같은 어느 날, 결국 미나씨는 무너지고 만다. 미나씨의 옆에 가족도, 애인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미나씨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불속에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된 건 헤어진 남자친구 때문이고, 언니만 예뻐하는 엄마 때문이라며 남 탓만 하며 살아온 미나씨는 29살의 어느 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일랜드행 비행기 티켓의 직항 편이 없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결국 혼자 힘으로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른을 앞두고  미나씨였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단편 드라마의 마지막화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실을 깨닫는 건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지만, 의도된 것인 지 아닌 지 모르게 미나씨는 지난 실수는 경험이 되지만 후회는 더 좋은 결과 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고, 프사를 없애며 드라마는 끝이 난다.




허지웅은 에세이의 한 챕터에서 이미 벌어진 불행을 붙잡고 있지 말란 말을 담았다. 요즘 에세이들이 위로 배틀이라도 하듯 입에 발린 말들만 옮겨 적는 일기장에 불과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터치해 본 허지웅의 말은 그 무게감이 다르게 다가온다.


허지웅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며 물을 닦아야 할 시간에 왜 그 자리에 물이 있었는 지, 왜 물을 다 마시지 않았는지 후회하고 화를 내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힘껏 노력할 뿐'이라는 문장은 깨끗하게 책을 읽는 사람도 밑줄을 치게 만든다.


미나씨에게 지난 연애는 후회였을 것이고, 프사를 바꾸는 일은 결과를 감당하며 노력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화. 프사를 없애는 미나씨의 모습은 한 뼘 더 성장해가는 어른의 모습이었겠지만, 고작 7화짜리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결말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보다 더 길고 지난한 매일을 살고 있으니 더 많이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하는 것이 정상범위의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원효대사도 아니고 해골물 한 바가지에 인생을 깨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시키지도 않은 비교질에 뒤졌다고 불안해하지 말고,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수했다며 후회를 쌓지 않도록 하자. 드라마의 중반도 오지 않았을 인생에 불행을 색칠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미나씨처럼 프사를 바꾸며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것들이 괜찮아 질지도 모른다.


매일 짧은 SNS 글만 쓰다 버릇하니, 며칠을 붙잡으며 길게 글을 써봐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프사나 바꿔봐야겠다.



*미나씨, 또 프사 바뀌었네요? 는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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