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가 끝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쉬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신선놀음을 하듯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낯설지만 온전히 휴식이라는 단어를 꼬옥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쉼이 고팠나 보다.
어쩌면 우리는 운명이라는 수레바퀴 안에서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방정식을 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라도 쉬면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수많은 비교와 수많은 고민들을 하지만 결국 답은 내 안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가장 현명한 답을 찾는다.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생채기를 참 많이 냈었다. 나를 몰라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서 내 안에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해 묵묵히 참아내기만 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솔직하지 못했다.
사람도, 사랑도 천년만년 가는 게 어딨겠는가.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며 안간힘을 다해 살아왔다.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어려운 것임을 알아가고 있는 인생의 후반전, 반질반질하게 다듬고 완벽함으로 채우던 나를 짠하게 보기 시작하니 그제야 헐떡거리던 숨이 보드라워졌다.
몇 년씩 묵힐수록 더 깊어지는 장 맛처럼 서서히 익어가며 발효 중인 나 자신을 토닥여본다.
매일을 맞이하며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도화지 한 장을 펼치는 기분이다.
오늘은 무엇을 그려 볼까나..
오늘은 어떤 하루를 남겨 볼까나..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찰나들을 마주한다.
몸에 힘을 뺀다는 말이 참 어렵다. 힘을 뺀다는 건 마음을 비우는 일이기도 하니까.
욕심을.. 기대를..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물 흐르듯 흐르는 시간에 맡겼던 휴가를 보내고 나니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밤 사이 도톰한 이불을 찾는 걸 보니 완연한 가을이다. 선선함을 벗어나 으슬으슬한 기운까지 느껴지게 한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끓여 주시던 들깨탕이 먹고 싶어 진다.
포근포근한 토란을 넣어 탕으로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지만 찹쌀을 불려 버섯과 함께 걸쭉한 들깨죽을 끓여 주시곤 하셨다. 돌절구에 반질한 돌멩이로 부드럽게 들깨를 갈고 물을 넣어 가며 박으로 만든 바가지로 곱게 간 들깻물을 퍼내셨다. 간 들깨물을 체에 밭쳐 뽀얗고 고운 국물을 걸러 내고 할머니의 거친 손이 하얀 분을 바른 것처럼 고와지게 보일 때쯤 아궁이에 적당히 불을 지핀 가마솥에 들깻물을 앉히셨다.
죽으로 끓여 주실 때는 불린 찹쌀을 들기름에 볶다가 물을 조금 넣고, 끓고 나면 우윳빛 들깻물을 넣으셨다. 계절에 맞는 야채를 더해 감자가 들어가기도 하고 부추가 들어가기도 했다. 찬 바람이 불 때쯤 햇 토란이 나올 때 할머니의 투박한 손으로 말끔하게 껍질을 벗긴 토란에 소금 반 큰 술을 넣고 뽀얀 쌀뜨물에 반나절을 담가 놓으셨다. 그렇게 토란의 아린 맛을 빼주고 나면 나박나박 썰은 무를 들기름에 먼저 볶다가 동글동글한 토란을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하셨다. 마지막 할머니만의 화룡정점 비법은 볶은 통들깨 한 수저를 넣는 것이다. 입 안에서 고소하게 톡톡 터지는 통들깨는 씹힐 때마다 나의 눈을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가을 찬바람이 속을 허하게 잡아 끌 때가 찾아 왔나 보다. 휘몰아치던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질 때, 잔뜩 긴장하던 일들을 끝마치고 나면 할머니의 들깨탕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이번 추석에도 들깨탕을 끓였다. 명절 때마다 느껴지는 허한 그리움이 바람으로 느껴졌는지 따뜻한 들깨탕으로 온기를 더하고싶었나 보다. 걸쭉하게 끓인 들깨탕에 할머니의 비법대로 볶은 통들깨를 한 손 가득 집어넣었다. 알알이 고소한 통들깨를 씹다 보면 보드라운 국물을 두어 숟가락 정도 국물을 입에 넣어야만 했다. 입 안에서 갈려진 들깨가 목 넘기기 사납게 느껴질 때쯤 보드라운 들깨 국물로 입 안을 잠재우고 나면 고소한 들깨 국으로 허해진 마음이 포근함으로 보살핌을 받는 것 같다. 어쩌면 할머니의 들깨탕은 7남매를 홀로 키우며 삶의 고단함을 느껴질 때마다 당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음식을 만들어 드셨는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지금의 내 나이가 들어서야 깨달았다.
이맘때쯤 눈처럼 하얗던 할머니 쪽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수확한 들깨를 마당에 말리고 들깨를 털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