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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Jun 30. 2024

매콤한 위로

오징어 볶음

    

주말 동안 신선놀음을 하듯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쉼이 고팠는지 온전히 휴식이라는 단어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생채기를 참 많이 냈었다. 나를 몰라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서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해 묵묵히 참아내기만 했던 시간들을 뒤돌아보니 난 나에게 늘 솔직하지 못했다.     


사람도, 사랑도 천년만년 가는 게 어디 있겠는가.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며 안간힘을 다해 살아왔었다.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어려운 것임을 알아가고 있는 인생의 후반전, 반질반질하게 다듬고 완벽함으로 채우던 나를 짠하게 보기 시작하니 그제야 헐떡거리던 숨이 보드라워지고 있다.     


매일 아침을 맞이하며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도화지 한 장을 펼치는 기분이다.

오늘은 무엇을 그려 볼까나..

오늘은 어떤 하루를 남겨 볼까나..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찰나들을 마주하며 하루를 맞이한다.

몇 년씩 묵힐수록 더 깊어지는 장 맛처럼 서서히 익어가며 발효 중인 요즘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무얼 먹을까?

냉동실을 뒤졌다. 언젠가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오징어 몇 마리가 냉동실에 숨어 있었다. 갑자기 매콤한 오징어 볶음을 떠올리니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서둘러  고추장과 청양 고춧가루에 맛간장, 마늘 한 스푼과 설탕 한 스푼 넣고 양념 소스를 만들었다. 오징어를 살짝 데치고 볶음소스와 함께 프라이팬에 볶다가 냉장고에서 뒹굴고 있던 야채들을 썰어 넣고 숨이 죽을 정도만 빠르게 볶아냈다.


아뿔싸!  밥이 없다.

요즘은 묵힌 밥이 먹기 싫어 그때그때 솥밥을 해 먹고 있던 터라 밥이 없다는 걸 깜박했다. 허기진 뱃속을 달래느라 햇반을 데웠다. 식탁 위에 반찬도 없이 매콤한 오징어 볶음과 햇반만으로 밥상을 차렸다. 하얀 쌀밥 위에 오징어 한 입! 빨간 양념이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렸다. 수저를 들어 크게 한 입 먹었다. 매콤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입안 전체를 맴돌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매콤함이 느껴졌다.

아, 행복하다!!

눈물 나게 맛있다. 젓가락으로 통통한 다리 살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한 입 한 입 먹다 보니 순식간에 프라이팬이 비워져 아쉬움이 가득 남았다.     


큰 딸이 대학 시절, 첫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오자마자

“엄마 배고파요. 엄청 매운 음식 해주세요.”

보아하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 눈물 콧물로 범벅이었을  딸아이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문득 나도 첫사랑과의 이별을 했을 때 큰딸처럼 엄청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엄마가 해주셨던 것처럼 나도 딸을 위해 세상에서 제일 매콤한 오징어 볶음을 만들어 주었다. 청양고추 듬뿍 넣어서.          


이별을 겪고 난 후 먹는 알싸하게 매운 청양고추와  매운 양념으로 볶아낸 엄마표 오징어볶음은 입 안에 불이 날 만큼 매웠다. 아마도 마음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딸을 위한 엄마의 매운 사랑이었을 것이다.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매콤한 오징어 볶음을 스읍스읍~ 아린 입을 후후 불어가며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던 딸아이에게,

‘엄마도 살다 보니 내가 어쩌지 못한 인연들이 참 많더라.

내 맘 다르고 네 맘 다르듯이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 수도 있단다. 어쩌면 나뭇가지와 그 위에 잠시 앉은 새처럼 ,

수많은 인연들을 거쳐 가게 되어 있지...

나뭇가지는 자기 곁에 잠시 머물렀던 새를 기억하고 그리워할지 모르겠지만, 창공을 멀리 날고 싶은 새는 그 나뭇가지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엄마도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지.  

무게와 깊이가 다른 인연들이 만나 서로 스쳐갈 수도 머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스쳐가거나 머무는 인연 모두 물 흐르는 대로 그대로 두다 보면 서로 운명처럼 마주하는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말로 다하지 못하고 심심한 콩나물국을 딸 앞으로 밀어주며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 전했던 기억이 난다.     


 “힘들고 외로워도 밥은 든든히 먹어야 해. 그래야 또다시 일어설 힘이 나지. 자, 요것도 먹어봐 ” 그렇게 한 마디만 했다.

살면서 무수히 만나질 인연들 속에 덜 상처받길 바라는 마음을 보태며. 그렇게 음식으로라도 위로를 받으며 버텨내길 바랬다. 수없이 넘어지고, 수없는 눈물을 훔쳐가며 살아냈던 나의 청춘처럼 딸이 살아갈 청춘의 시간이 위로받기를 바라는 인생선배의 마음을 담아 매콤한 한 끼를 차렸던 기억이 난다..     


그 옛날 스무 살,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나에게 엄마가 건네주던 한 마디가 떠오른다.

“그래 실컷 울어라. 눈물이 안 날 때까지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눈물 콧물 흘려가며 매운 오징어 볶음을 먹으면서 이별의 후유증을 겪어냈던 낭만의 스무 살!

매콤한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우리 딸도 훗날 자신의 스무 살을 낭만으로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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