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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의 May 21. 2024

성장에서 벗어난 미래를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간 잉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은 버린 『자본론이 바로 그 빨간 잉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ㅡ prologue 『자본론』과 빨간 잉크



◇ 무력한 소비자이자 무력한 생산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인생의 답을 깨닫기에는 이른 나이이기는 하지만, 대학을 막 졸업한 20대 중후반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을 낼 수 없는 고민에 흠뻑 빠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절대로 나를 살릴 수 없을 것 같아 선택한 '내가 썩 좋아하지는 않아도 나를 굶길 일은 없는 일'이 고민의 원흉이었다. 그 일을 시작한 결과, 내가 좋아하는 일과 좋아하지 않는 일 모두 나를 괴롭힐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나의 일이 몸이나 마음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내가 했던 일은 나의 성향과도 무척 잘 맞았고, 특히나 웬만한 일에 무덤덤한 성격은 허구한 날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에 꽤 괜찮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를 둘러싼 모든 일과 상황, 환경이 슬퍼졌다. 나에게는 무척 소중했던 동료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강도 높은 업무를 해도 보상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업무 능력도 인정받지 못했다. 나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맡은 일은 너무 파편화되고 도무지 맥락이라곤 알 수가 없어서 나의 일이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뭐든 질문이라도 하면 '네가 왜 그것까지 알아야 하느냐'라는 방어적인 말만 들었다.


내가 맡은 일은 왜 전체 맥락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파편화되었을까? 그때는 이런 질문을 미처 떠올리지도 못했다. 다만 내가 맡은 일은 너무 잘게 쪼개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것, 누구라도 나를 대체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할 이유가 없을 거라는 직감만 들었다.


실제로 어느 글로벌 대기업에서는 내가 맡은 종류의 일을 이미 몇 년 전부터 기계로 대체하던 시기였다. '기계를 일터에 도입했다고 해서 인간들의 일자리가 빼앗긴 건 아닙니다. 기계의 일을 보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도입으로 효율성이 높아져 직원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편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해당 기업의 뉴스 기사 중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있던 걸 언뜻 본 기억이 난다. 


'글쎄다, 기계 덕분에 일은 편해졌을지는 몰라도 인간의 마음은 더 괴로워졌을걸.'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그 기사를 보자마자 반항심이 생겼다. 기계의 일을 단지 '보조'하기만 하면 될 정도로 파편화된 노동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소멸시키는지, 어떻게 일의 의미를 빼앗아가는지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마음을 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일터에 기계를 도입하면 대량의 일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이는 사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니 무척 좋은 일이다. 아무리 파편화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일자리를 얻어낸 것 자체가 축복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건네는 선언이고 우리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영원히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될 것이니까. 게다가 어쨌든 공산주의보다는 나아 보이지 않는가?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인 성장, 생산성, 효율, 부에 대해 비판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우리에게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은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왜 자본주의에서는 돈을 효율적으로 버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가?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과 숲처럼 과거에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던 코먼(모두의 공유재산)이던 '부'는 자본에 의해 독점되어 '상품'이 되었다. 이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용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가격으로 측정할 수 있는 '가치'는 최우선적인 것으로 구분 짓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 충족이 아닌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서 혼자서는 자급자족할 수 없는 개인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의 노동력은 분업과 협업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결국 개인은 스스로 완제품을 만들 능력은 영영 갖추지 못하고 분업 시스템 안에서만 일할 수 있게 되면서 주체성을 잃게 된다.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은 이처럼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서 '부'를 앗아가는지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자본론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읽고, 마르크스 사상을 21세기에 살릴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를 상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물론 책 한 권 읽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에 부담을 느낄 때에도, 가성비를 추구하는 삶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에도, 무엇이든 돈벌이로 삼는 세상에 환멸이 느껴질 때에도 이제까지는 감히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말을 아끼고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은 자본주의에서 벗어난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볼 수 있도록 생각을 확장시켜준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자연 고갈, 환경 오염, 전염병, 인구 감소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이 세상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염원대로 무한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돋보였던 가치들이 향후에도 정말로 가치 있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당연한 건 점점 더 없어진다. 공기는 더 이상 당연하게 맑은 것이 아니게 되었고, 전쟁이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게 중요했던 가치들도 언제까지고 영원히 당연한 것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런 사회의 귀결은 궁극적인 가성비 사회입니다. 결혼의 가성비? 육아의 가성비? 문화의 가성비? 민주주의의 가성비? 

당연히 인생에서 행위 대부분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성비 사고를 철저하게 하게 되면 소통, 문화, 정치 참여, 세상의 많은 활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커뮤니티와 상호부조는 쇠퇴하고 사회의 부는 점점 더 앙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를 얻으려고 하는 동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눈치챌 때, 부를 되돌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을 때 우리에게 당연한 것을 잃어도 우리의 삶은 공동체와 함께 흔들리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답을 찾고 싶은 질문]


            자본주의의 부작용에서 벗어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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