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골드마인과 헤드윅 : 글램 록의 시대
1970년대 초반에 흥했던 '글램 록'은 당시 영국의 시대 배경과도 연관된다. 큰 불황을 겪었던 영국에서는 짓눌린 감정을 노래와 자신을 독특하게 치장하는 등의 형태로 표출했으며 이는 글램 록 시대의 가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을 보며 같은 글램 록 영화인 <헤드윅>이 생각났다. 두 영화는 두 개의 큰 연결고리가 있다. 하나는 글램 록만의 특별한 화장과 의상이며, 둘째는 의상과 스타일 속에서 발현된 그들의 동성애, 양성애적 양상이다.
<헤드윅>에서의 한셀이 자신의 몸을 꾸밈없이 드러냄으로써 성적 탈피와 자유를 실현시키고자 했다면, <벨벳 골드마인>의 브라이언은 화려한 분장과 깃털 속에서 자유로운 죽음(으로 보이는)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내 죽음이 거짓으로 밝혀지며 브라이언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과연 이 죽음과 추락이 정말 브라이언을 불행케 했을까? 스타의 위치에서의 삶은 진실된 삶이었을까? 이러한 서사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한다.
꾸밈없고, 거친 감정을 표출해내는 글램 록 장르와 스타라는 가면 속에서 살아가는 가수 브라이언, 브라이언은 두 가지의 갈래에서 결국 무대를 포기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지킨 것인지는 미지수다. 브라이언은 훗날 아서의 추적에서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브라이언이 정말 죽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다.
브라이언과 커트 와일드의 키스가 신문 1면을 장식했을 때, 아서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깨닫게 됐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문을 장식하고,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추락한 브라이언은 자신 얼굴 현수막이 태워지는 뉴스 보도 장면을 반복해서 응시한다.
당시에도 젊음이 있었다
이 영화는 1970년대의 진한 노스탤지어를 남긴다. 그 시대의 젊음과 지금의 젊음은 다르지만, 당연하게도 젊음은 항상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렇다. 화려하고, 퇴폐적인 글램 록 시대는 분명 우리의 시대도 아니거니와 대한민국의 1970년대와는 전혀 다른 문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괜한 여운을 느낀 이유는 바로 ‘젊음’이란 공통분모 안에 우리가 잠시 동안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 속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브라이언, 아서, 카터 와일드라 해도 말이다. 지능 높은 인간도 과거의 기억은 결국 기억하기 쉽게 요약되고, 망각된다. 우리는 망각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시민 케인>의 전개 방식처럼 브라이언과 카터의 이야기 속에는 과거 그들을 동경했던 아서가 있다. 젊은 아서와 현재 기자가 된 아서의 행색은 타인이라 할 정도로 다르다. 이제 그는 젊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합당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방대하다. 영화 <벨벳 골드마인>은 성소수자의 발악도, 성관계와 마약에 찌들어 타락한 스타의 인생을 담은 영화도 아니다. 순수하게 뜨거웠고, 열정 가득한, 세상을 몰랐기에 세상에 반항할 수 있었던 ‘젊음’을 이야기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