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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a Mar 08. 2024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 #9

아들이 대신 써주는 엄마의 인생

정신이 번쩍 들며,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심했다.


"선생님, 저 입원시켜주세요. 그리고 저의 마음의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말하니,


내일이라도 보호자와 함께 방문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한 말씀이 있었다.


"여긴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는 건 본인 마음대로 나가기 힘들다고."


난 괜찮다고, 고쳐서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다음날 남편과 딸과 함께 입원했다.


세상을 너무 얕봤던 걸까, 태어나서 이런 곳에는 처음이니까.


들어감과 동시에 철문이 꽝 닫히더니, 병원 전체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고, 방에 또 방이 있으며, 창문에 창살이 박혀 있었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나"라는 한순간의 생각에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 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갑자기 어두운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막막함에 "제발 저를 내보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소리치니,


침대에 누워 손발을 침대 모서리에 묶어 꼼짝도 못하게 하고 안정제 같은 주사를 맞으니 힘없이 쓰러져 모르게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다시 그 자리였다.


이제는 겁에 질려 아무런 반응 없이 시키는 대로 할 뿐, 복사붐 벚꽃이 활짝 피어 있는 봄날, 알코올 병동에 있었다.


그러나 가끔 선생님 인솔하와 함께 소풍도 갔었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는 거리가 멀었다.


알코올 중독자, 상습적으로 자살하려는 자해자, 헛소리하는 정신병자 등 여러 분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돈 많은 부자 할머니도 계셨다.


"할머니, 산 좋고 경치 좋은 실버타운 가시지 왜 여기 오셨어요?" 하니 외로워서라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여러 분류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공부한 명리학을 설명해주고 사주팔자 이야기도 하며 두려움도 점점 사라졌다.


여기 병원 원장님 부친께서는 대구에서 정신과 원장이셨다고 한다.


한 번씩 병동에 오시곤 했다.


한 사람씩 상담해 주시기도 했다.


솔직히 이 병원도 아버님이 물려 주신 것 같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세 번째 수요일마다 오신다고 할아버지 원장님께서 "당신은 여기에 들어올 사람이 아닌데 왜 왔지요?"라고 물었다.


지난날들을 모두 얘기했고 가족도 괴롭힌다고 지금이라도 보내주면 술 안 마실 수 있겠느냐고 약속할 수 있느냐 물으셨다.


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던 것 같다.


"원장님, 두 번 다시 술 찾지 않고 성실히 살겠습니다."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그럼 내가 보내줄 테니 나가서 절대 술 마시지 말고 희망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라."며 돌아가셨다.


"원장님, 저는 누가 밖으로 보내주나요?" 물어보았지만


여기 아들 원장님 알아서 보내줄 거라는 말씀만 남기고 가셨다.


여긴 2주에 한 번씩 가족과 통화할 수 있도록 공중 전화가 있었다.


어느덧 2주, 남편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남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청천벽력같았다.


"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던데?"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야, 아버지 원장님께서 나가도 된다고 했어."라고 하니 그 다음날 남편이 병원에 찾아와서 밖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다.


남편이 찾아와 퇴원시켜 달라고 병원 앞에서 있으니 남자 직원들도 놀라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으나


남편은 병원에 불 질러버리기 전에 내보내 달라고 반 협박조로 병원 입구에서 행패를 부렸다.


결국 조폭같은 남자의 으름장에 병원에서는 조금 있다 나를 보내주었다.


함께 퇴원하면서 남편 차를 타고 우리 둘은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다.


"내가 다시는 이런 곳에 보내지 않을게."라며 남편도 울었다.


꼭 자기가 보낸 것처럼...


내 발로 걸어 들어 갔는데 앞으로 잘할게요.


그런데 그곳에는 정말 불쌍한 사람들도 많았고 어린아이도 있었다.


몇몇 사람은 나를 따르고 좋아해 준 사람도 있었다.


한 번씩 척도 보내주고 편지도 써 주고 했다.


하지만 동사무소에 댄스를 배우러도 다니고 장구도 배우고 볼링, 탁구, 당구도 배우면서도 생활의 무료함과 무기력이 친구를 찾기보다 술을 더 가까이 했고 술이 친구이자 모든 것으로 다시 변했다.


다시 또 도돌이표 술 한 병, 남편이 인상 쓰고 야단치면 술 한 병, 성격은 더 격해지고 더 난폭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난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도돌이표 생활 8년 만에 우린 2018년 한겨울에 양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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