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지원하는 1:1 맞춤형 상담을 시작했다. 모락모락(母樂母樂)이라는 아기자기한 이름을 가진 이 프로그램은 임산부나 어린아이를 키우는 여성들 중 우울감이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직전에 참가했던 우울 예방 마음 돌봄 프로그램에서 소개를 받아 기회를 얻었다.
때마침 나의 정신과 주치의 김날따 선생님의 휴진 기간이라 상담할 누군가가 필요한 참이었다. 그러나 부디 유능한 상담사가 배정되기를 바라던 마음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너무나 앳된 목소리에 와사삭 바스러지고 말았다. 이런 애가 내 40년 묵은 어둠과 아이 키우는 고충을 상담해준다고? 취소하고 그 시간에 잠이나 잘까고민하다가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내 몸과 마음이 조금이라도 건강해질 가능성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다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상담일, 정말 대학생 같은 외모의 상담사가 나타나자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 사람이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취소하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며 상담 테이블에 앉았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담사는 눈빛을 반짝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나는 공황장애, 육아에 대한 두려움, 특히 내가 아이를 방치했던 시간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 말했다. 답을 기대하지 않은 그냥 넋두리였다.
“아이가 지금 네 살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네 살 때 일이 지금도 기억이 나거든요. 엄마랑 뜨개질을 했는데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저는 신니님도 지금부터 아이랑 이렇게 행복한 기억을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아이도 저처럼 엄마의 사랑을 느낄 거예요. 제가 나이가 어려서 부모의 입장은 잘 모르지만 자녀의 입장은 아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아직 하나도 늦지 않았어요.”
상담사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그녀는 전문가인 척, 많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엄마니까 무조건 할 수 있고 힘내야 한다는 뻔한 멘트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본인 경험치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정직하게 아는 범위 내에서 최선의 조언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지금부터라도 아이와 많은 추억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삐딱함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앞으로 그녀를 유최선 선생님이라 부르겠다.
첫 상담에서 내가 공황장애라는 말을 들은 유최선 선생님은 상담 2회 차에 올 때 공황장애에 대해 공부를 하고 왔다고 했다. 게다가 공황장애 수기가 실린 책의 줄거리와 목차를 인쇄해와서 내게 읽어보라며 줬다. 선생님의 성의에 감탄했다.
모락모락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가 생기자 나는 요즘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지인에게도 추천해주었다. 상담 3회 차에 가니 지인이 센터에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기뻐하는 내게 유최선 선생님이 거듭 말했다.
“이분이 하겠다고 연락이 왔지만, 혹시 뭔가 잘 안됐다고 하더라도 절대 신니님이 그걸로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신니님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거고 거기까지예요.”
나의 추천이 지인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일말의 책임감마저 느꼈는데 선생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그 말을 한참 곱씹고 나서야 비로소 내게 결과까지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과 그게 건강하지 못한 사고라는 걸 이해했다.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하늘에 맡기면 된다’가 아니라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성과를 중시하며 살아온 내게 꼭 필요한 삶의 이치였다. 덕분에 나는 지인에게서 오매불망 보람찬 소식을 기다리는 대신 그저 그녀가 잘되기를 빌며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유최선 선생님은 정말 준비를 많이 해왔다. 상담 4회 차에는 한 공황장애 사이트를 알려주기도 하고 조현병을 취재한 PD수첩도 보라고 추천도 해줬다. 거기에 조현병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며 그걸 보면 용기가 생길 거라고 했다. 방송을 찾아보니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이 병을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요리교실에서 튀김을 튀겨내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도 조현병을 가졌으면서 다른 조현병 환자들을 돕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론을 통해 무서운 사건으로만 접했던 조현병이 경우에 따라 조절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약물과 인지치료를 병행하는 모습은 공황장애와 다를 바 없었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보며운명보다 강한 것은 의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5회 차 상담에서는 복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야간응급팀 소속이라 밤 10시까지 근무하니 평소에도 힘들면, 그리고 특히 복직해서 힘들면 밤에라도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상담을 시작하자마자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지난 시간에 내가 언급했던 복직에 대해 미리 생각해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상담을 하며 나의 좋아지는 모습,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하나라도 더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예쁘다는 말을 총 4번 들었다. 그게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지. 내가 상담에 빠지지 않아서, 또 시간 약속을 잘 지켜서 훌륭하다고 말해줬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칭찬을 받자 몰랐던 나의 애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번은 선생님이나더러 지금 너무 잘하고 있으니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유지’에 중점을 두라는 놀라운 이야기를꺼냈다. 지금 일도 못 나가고 애도 제대로 못 보고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데 이걸 유지하라고? 나의 음울한 상태를 잘 몰라서 하는 말 같았다. 그런데 왠지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동안 쌓인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말에 힘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이후 이거밖에 못해도 괜찮을까, 아직도 공황장애가 이렇게 심해서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 때 유지만 하라는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며 조바심을 진정시킬 때가 있었다.
상담 내용 중에서 내가 가슴에 담아두고 가장 자주 떠올리는 말은 '미래에 대해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가져라'이다. 거의 매일 불안감에 휩싸여있는 내게 ‘어떻게 될까↘’와 ‘어떻게 될까↗’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관점을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이때부터 호기심은 내게 특별한 단어가 되었다. 지금도 두려움이 생길 땐 속으로 '어떻게 될까아아~~~?'하고 발랄하게 묻곤 한다. 그러면 마음에 달린추가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프로그램 말미에 에든버러 산후 우울증 척도 검사를 하던 중 검사지의 제목을 보고 십 년 전 에든버러 여행의 추억이 소환되었다. “선생님, 영국에 가면 에든버러에 꼭 가보세요. 거기 가면 순대랑 똑같은 하기스라는 전통 음식이 있는데 스테이크처럼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답니다. 하하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매 상담마다 눈물을 찍고 있었는데, 내가 최초로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 느낌이 낯설었다. 그동안 아이,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자동으로 말이 없어지고 죄인 모드가 되었는데.이 낯섦이 반가웠다.
내게 아무것도 내어줄 것이 없을 것 같았던 어린 상담사는 6주 내내 나를 감동케 했다. 이 상담에서 얻은 가장 값진 배움은 한계에 맞서는 태도다. 유최선 선생님은 지식과 경험치의 부족을 의지와 성실함으로 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심지어 아이와 놀아주는 게 자신 없다는 나의 말에 그 다음 주에 아이와 놀아주는 법을 조사해올 정도였으니. 언제나 갖은 핑계로 못 한다는 구실을 찾기 바쁘던 나에게 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준 스물여섯의 스승. 내 삶의 궤적에 유최선 선생님이 남았다.
상담이 끝난 후에도 선생님은 가끔 안부전화를 준다. 그 책임감에 감사하고 국가에서 나를 관리하고 지원해준다는 사실이 무척 든든하다. 알고 보니 각 지역마다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있어서 정신 건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제도를 알고 자신만의 유최선 선생님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