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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하늘 Dec 02. 2022

사회적 재난, 그 무력감 앞에서

What we have to do

한 블로그 이웃님의 글을 보다, 요즘의 내가 마주하고 있는 고민들에 보다 깊게 다가가게 되었다. 이웃인 키마 님의 주제는 SPC 산업재해 노동자에 관한 글이었다. 그 글을 보며 요즘의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고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요즘 나의 하루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하루로 시작된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말고 자재가 급해 뛰어오신 분들, 그리고 18L짜리 페인트 운송하는 일을 하시다 허리와 온몸이 성한 곳이 없으신 분들까지, 내가 요즘 만나는 분들은 자기 앞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계신 분들이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지 않은 직업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선생을 하며, 아이를 잃어보았고, 그 고통은 아직도 여전히 나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자, 아픔이자, 분노이다. 남편 역시 하루하루 마음이 아픈 학급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고, 그 애달픔이 나에게도 와닿을 때가 많다. 이밖에 의사 선생님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서 가장 뼈저리게 그 아픔을 직면하고 있으리라. 지난주에 진료실에서 마주했던 환자를 불현듯 오늘은 마주하지 못할 수도 있는 현실을 애써 담담하게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군인, 소방관, 경찰관 등 목숨을 걸고 위태로운 일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시는 분들 모두가 초인처럼 느껴진다.


그런 노동의 현실 속에서, 또 나는 경영자의 관점에서도 삶을 바라보고 있다.

실은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관리자나 경영자들의 대다수도 두렵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사투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했듯 말이다. 아버지가 걸어온 삶의 고단함과 보이지 않는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나날들이다.


다만, 삶이 참 슬픈 것은 노동자와 관리자 사이에 주어지는 대가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웃님인 키마 님께서 인용하신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지만, 노동자로서의 대가는 주어진 삶에 대한 슬픔 또는 고통이지만, 관리자에게는 적어도 그 슬픔과 고통을 잊을만한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관리자들 역시 자신들이 거쳐온 슬픔과 고통을 그 대가를 통해 잊었다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을 하는 이들도 존재하겠지만, 나는 적어도 일말의 양심을 가진 이라면, 그 고통은 쉽게 잊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실은 대부분의 관리자 혹은 경영자들 역시 잊은 듯 하지만, 그들 역시 잊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나의 소중한 시어머님은 오랜 시간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삶을 지내오셨다. 그녀의 삶에도 산업재해로 인해 크나큰 삶의 위기가 찾아왔었고, 이는 그녀의 삶에 큰 무력감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은 그 기간을 다시금 보통의 일상을 찾는 일을 통해 극복해내셨고, 다시 삶을 살아내셨다.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생산품을 소비할 이들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셨다. 내가 어머님을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나의 소중한 어머니는 오랜 시간 경영자의 입장에서 삶을 살아오셨다. 그녀의 삶은 곪다 못해 터져 나와 몇 해전부터 온 몸으로 아픔을 드러냈고, 이 또한 그녀의 삶에 큰 무력감을 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 역시 보통의 일상을 찾는 일을 통해 극복해내시며, 삶을 살아가신다. 그녀 또한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위해, 평생을 인내하며 살아내셨다. 이 또한 내가 엄마를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니체의 초인이라는 말을 빌려오자면, 나는 우리 모두가 이미 자기 생 앞의 초인인 존재라 생각한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 어려운 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특별한 깨달음, 특별한 무언가가 나를 초인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우리는 모두가 초인이고, 생에 대한 의지를 가진 존재들이니까.


노동자와 관리자, 노동을 하는 이와 관리 및 경영을 하는 이,

실은 모두가 서로에게 빚을 지며, 초인이 되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만한 노동의 대가를 짊어진 경영자들이 사회에 더 큰 환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 나는 그 양갈래의 입장에 놓인 사람으로서, 우리 생의 슬픔을 목도하는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꿈꾸는 것들이 생겨난다.


아이들이 좀 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적 차원에서 돕는 것뿐만 아니라, 훗날 보다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재단 혹은 기관, 시설 등을 마련해보고 싶다는 나지막한 소망도 가져본다. 과거의 어린 내가 사회로부터 무수한 도움을 받았듯, 나 또한 그런 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작은 소망을 품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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