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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채원 Nov 09. 2021

존재를 긍정하는 힘을 믿으며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 1-7화 내용 전반을 중심으로

 올해 여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완전히 몰입해서 봤는데, 등장인물들 중 장겨울 선생 역할을 맡은 신현빈 배우의 큰 팬이 되었다. 


먼저, 유능하고 성실하며 솔직 담백한 장겨울 캐릭터는 내겐 너무 매력적이었다. 드라마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겨울은 겉으로 표현되는 감정이 그리 풍부한 캐릭터는 아니다. 늘 약간 뚱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저 제 할 일을 묵묵히 하는 타입. 그래서 자칫 건조해보일 수 있는 캐릭터에 다채로운 입체성을 부여한 신현빈 배우의 몰입력과 캐릭터 해석력에 큰 감탄을 하곤 했다. 신현빈 배우가 출연한 다른 작품들과 인터뷰들을 찾아보며 미술 이론을 전공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역시나 그 깊은 해석력은 미술을 깊이 다루고 공부했던 흔적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신현빈 배우의 신작인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도 꽤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드라마에 관심을 갖고 원작인 정소현의 단편 소설 "너를 닮은 사람"을 먼저 읽었다. 해당 작품으로 작가 정소현은 2012년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작품 전반적으로 가진 흡입력과 곳곳에 배치된 반전 장치,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긴장된 감정선까지 섬세하게 잘 짜여진 작품이라 드라마 또한 큰 기대를 했었다. 드라마 캐스팅 소식을 듣고 나서 작품을 읽어보니 '나'가 될 고현정 배우와 '클라인'으로 불릴 신현빈 배우의 호흡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첫 장소가 괴테 독일 문화원이라는 점에서도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괴테 인스티튜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그런데 내 주변엔 '아, 남산 밑에 거기!'를 외치며 그곳을 아는 이들이 왜 이리도 많던지...아무튼 텍스트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긴장되는데  실제 인물들끼리 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연출할 수 있을까 싶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보여준 신현빈 배우의 연기와 그의 작품 고르는 안목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우려 보다는 기대를 해보기로 했다. 드라마는 아무래도 원작인 단편소설보다는 그 내용이 더 풍부해질테니 소설의 내용을 발전시켜 어떤 다양한 서사와 정서를 보여줄 지 궁금했다. 


  대부분의 삶을 가난하게 살다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남편을 만나 삶이 완전히 전환된 정희주 역할은 고현정 배우가 맡았고, 마찬가지로 집안 형편은 어렵지만 이 와중에도 자기 재능을 살려 미술 공부에 열심인 미술 학도 구해원 역할은 신현빈 배우가 맡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남산에 있는 괴테 문화원에서 만난다.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엄마, 아내 역할 이외에 순전한 자기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여기던 희주는 우연히 길 가다 본 괴테 문화원에서 독일어 수업을 수강하게 되고, 독일 유학을 위해 분주히 준비하며 자기 삶을 꾸려나가던 가난한 대학생 해원을 만난다. 둘은 비슷한 배경을 가져서인지 몰라도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여기 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와 학업을 이어나가던 해원이 안쓰러웠던 희주는 그에게 그림을 배우며 돈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탓일까. 서로의 삶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마구 뒤섞이던 와중에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터진다. 이로 인해 희주와 해원은 찢어지듯 단절된다. 결국 해원은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미술도 관둔다. 도리어 미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희주는 남편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라 학위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유명한 작가가 된다. 마치 해원의 꿈을 가로챈 것처럼. 


 실제로 희주가 해원의 것을 가로챘다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는 우재라는 또 다른 인물이다. 우재는 해원의 선배이자 애인으로 유학을 준비하던 당시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소설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드라마에서는 부부 유학의 혜택을 위해 혼인 신고까지 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의욕 없고 불안정해보이는 우재는 엉뚱하게 희주를 애정의 대상으로 삼고 희주 또한 그 치정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결국 둘은 해원을 남겨두고 아일랜드로 도망간다. 물론, 희주는 가족들에게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큰 딸의 뒷바라지를 겸하여 아일랜드로 유학 간다는 명목을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들 호수가 생긴다. 우재는 해원을 버렸으나 희주는 자기가 쥔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 우재를 버리고 갓난아기 호수와 함께 아일랜드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일련의 일들로 인해 해원의 삶은 파괴되고 송두리 채 바뀐다. 희주에게 버려진 우재의 삶 역시 그러하다. 


  희주와 해원은 비슷한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둘 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각자의 어머니는 양육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희주의 엄마는 알콜 중독자였고, 해원의 엄마는 18살에 해원을 낳아 자기 아버지에게 맡긴 채 한동안 방황을 했었다. 그리고 그 방황 가운데에는 해원의 엄마를 스쳐지나간 수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에서야 해원과의 관계를 그래도 이어가는 것 같은데, 해원과 해원의 엄마 사이는 양육자와 피양육자가 전복된 것 같다. 오히려 해원이 해원의 엄마를 보듬고, 해원의 엄마는 해원에게 의지한다. 해원의 외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해원이  엄마로부터 전해듣고 이를 해결하려 급히 가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관계성은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희주의 엄마는 술에 해원의 엄마는 남자에게 의존했던 것을 보면, 희주의 엄마와 해원의 엄마 모두 불안정한 사람들이었다.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만 엄마가 딸의 자아상이라고 가정한다면, 희주와 해원은 둘 다 온전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어느 정도 심적인 결핍을 떠안고 사는 셈이다. 


 심적 결핍과는 대조적으로  희주와 해원 모두 미술이라는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원은 희주보다  더 어릴 때 자기 재능을 알아차리고 미술 학도의 길을 걷는다. 희주는 뒤늦게 해원을 만나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 이를 계기로 유학하고 돌아와 이름 있는 작가로 활동한다. 해원에게 그림을 배우던 시절 희주는 미술을 통해 엄마 혹은 아내가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더 일찍 미술을 시작한 해원에게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기를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재와 희주를 동시에 잃고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해원의 삶이 이전과 달리 공허하다. 그 이유는 희주에게 그렇듯이 해원에게도 결핍된 마음을 채우고 자기를 찾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미술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렇게 서로 공통점이 많은 희주와 해원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나를 닮은 사람"일수도 있겠다. 다만,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희주와 해원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희주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였고, 반면 해원은 끝끝내 지금까지도 스스로를 긍정해오고 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단지 좋고 나쁨으로만 규정지을수는 없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그 모습을 부정하여 왜곡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긍정과 부정을 논해보고자 한다. 먼저, 희주는 과거에 스스로가 처한 가난한 삶을 치열하게 벗어나고자 노력하였고 지금의 부유한 남편과 결혼에 성공했다. 지금 희주의 모습은 과거에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기 힘들만큼 완전히 달라져있다. 지금의 삶을 지키기 위해 희주는 자기 존재를 잃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폭언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상냥한 아내, 다정한 엄마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앞서 언급했듯이 어머니와 아내의 상(image)이 부재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겉보기에는 별 무리없이 그 모든 역할들을 해내고 있다. 희주는 원래 주어진 자기 모습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그나마 희주가 역할극에 구애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기 모습이었을 때는 우재와 함께 살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도 우재를 버리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감으로써 다시금 희주는 자기 존재를 한번 더 부정한다. 희주가 그토록 자기를 부정하는 결정적 이유는 날 것의 자기 모습에는 언제나 가난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희주는 자기가 싫은게 아니라 자기가 겪어온 가난이 싫었을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순 없겠다. 가난이 좋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런데 해원은 희주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난에 깃든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다. 


 해원은 가난한 자기 처지를 마구 저주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희주는 언젠가 해원의 모습을 보며 가난 조차도 장식품으로 만들 만큼 그 모습이 싱그럽고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해원은 어려운 처지인 와중에도 미술이라는 꿈을 찾고 이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알바를 몇 개씩 뛰면서도 어학 자격증을 따기 위해 괴테 문화원에 꾸준히 다니고 한 클래스를 세번이나 듣는 의욕을 보인다. (나보다 해원은 열 백배 낫다. 난 뭐 이리도 핑계가 많았는지.) 그 와중에 해원이 그린 작품들은 순수하고 맑다. 연인 우재는 이러한 해원의 그림을 사랑했다. 애석하게도 해원은 그 사랑을 자기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해원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과 자기가 그린 그림은 둘 다 동등하게 소중했을테니 말이 될 법도 하다. 우재는 해원의 그림만큼 해원을 사랑했던 것 같진 않다. 해원이 그림을 통해 표출하는 그 순수함을 사랑했을 것이다. 우재 자신은 표현할 수 없는 그 순수함. 희주와 해원처럼 우재 역시 천재 조각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그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채 미술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캐릭터이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자아상이라면, 우재 또한 온전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우재가 해원이 아닌 희주에게 마음을 줬던 것은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해원보다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희주에게 더 미묘한 연민과 동질감을 느껴서가 아닐런지 싶었다. 


 여하간 해원은 가장 소중했고 그렇기에 가장 신뢰했던 두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완전히 좌절한다. 이전에 싱그러웠던 해원은 더 이상 없다. 이 지점에서 해원 또한 자기를 부정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 순수하고 의욕넘치는 해원은 사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온갖 부정적 에너지로 점철된 스스로를 끌어안은 해원을 보았다. 그건 또 다른 자기 존재에 관한 긍정이었다. 희주의 방식대로라면 해원은 두 사람과의 단절로 인한 현재의 자기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원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해원과 희주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상반되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 해원과 희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우재와의 결혼을 감행하려는 해원에게 희주는 네 밑바닥 인생을 바꿀 마지막 기회가 결혼인데 그걸 놓치지 말라고 나름대로 애정어린(?) 충고를 한다. 그런데 해원은 그건 언니의 방식이지 나의 삶은 그와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재하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해원에게 행복이란 스스로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고, 이것이 또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해원이 그림을 통해 자기를 드러냈고 그 그림을 사랑해준 이가 우재이니 우재와 함께하는 삶이 해원에게는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지금의 해원의 모습만 놓고 보면, 씩씩하고 밝았던 과거의 해원의 모습 또한 어쩌면 해원 스스로의 결핍과 고통을 가리기 위한 또 다른 가면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해원은 두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에 초라해져버린 자기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파편화된 자기 존재의 조각 조각을 한대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의 일로 부정될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해원은 현재를 살고 있다. 독일은 추우니 필요할 것이라며 언젠가 희주가 아울렛에서 사서 해원에게 선물해준, 희주에게는 값싸고 해원에게는 비싼 그 초록색 코트가 파편화된 자기 모습의 여러 조각들 중 하나를 차지할 것이다. 해원은 이 코트를 언제 어디서나 입고 다닌다.  두 사람을 잃었을 때, 공허해져버린 그 눈을 여전히 간직한 채. 


 해원을 보면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말 없이 떠나고 난 뒤 몇 년이 지나고서야 걸려온 우재의 전화에 기다리면 올거냐고 울먹이는 해원의 모습이, 다 가진 언니한테 없는 하나라서,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전부였던 사람을 빼앗았냐고 울부짖는 해원의 모습이 여전히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아려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다만, 아니 난 너희 같은 쓰레기들은 내 머릿 속에서 다 치워버린지 오래야. 생각한적도 없어 라는 식의 소위 말하는 사이다를 유발하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서, 과거에 집착하고 얽매인다는 희주의 비난을 들은지언정, 해원은 늘 현재의 자기 모습이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이를 온전하게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해서 통쾌하지 않을지라도 아무렴 어떠한가. 그 모습이 좀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더라도 스스로 그 굴레를 정리하고 극복할 의욕이 있을 때까지 해원이 마음껏 얽매이고 표출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들 크고 작은 광적인 요소들을 마음 속에 품고 살지 않는가. 아, 나만 그런가.) 다만, 해원의 결말이 결국 자기파괴라면 그 또한 너무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감히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에게는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힘이 있으니까. 엄마처럼 자기를 보듬어줬던 희주도, 자기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자기 그림을 사랑해줬던 우재도 해원을 지키지 못했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있는 힘이 결국 해원을 지켜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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