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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널목 May 04. 2020

결혼 이야기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 2019)의 스포일러가 있어요.



모든 이별이 갑작스러운 것은 모든 사랑이 연극적인 까닭이다. 감정은 매순간 변화하지만 연기를 그치기 전까지 가면 아래 얼굴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서로에게 완전히 솔직한 관계가 아니라 차라리 공동연출, 공동주연의 역할극을 충실히 수행하는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찰리(애덤 드라이버)와 니콜(스칼렛 요한슨)의 직업 설정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연출가-남편과 배우-아내로 분담된 역할은 그들이 결혼에 실패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이 보는 것은 어두운 무대에 나타나는 니콜의 얼굴이다. 찰리가 아내의 장점을 열거하는 몽타주가 이어진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일상이 아닌 무대 위 니콜의 얼굴부터 보여준 감독의 의도는 분명하다. 찰리가 생각하는 아내의 장점이나 두 사람 사이의 규칙 들을 니콜은 사실 무대 위 배우처럼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 그렇다면 니콜에게 이혼은 찰리가 연출하는 대로 연기하는 걸 그만두겠다는 결심과도 같다.

 

두 사람이 이혼을 결정함과 동시에 그 연극이 끝나지는 않는다. 적어도 찰리에게는 그랬다. 두 사람 사이에 변호사를 개입시키지 않고 이혼에 원만히 합의하기로 한 동안, 찰리는 연극이 계속되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 연극이 연극인 줄도 몰랐다. “성가신 상황에서도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는 찰리가 ‘상대의 장점 편지’에서 첫손에 꼽은 니콜의 장점이었으니까. 니콜이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로라 던)를 만나고, 찰리에게 이혼 소장이 전달되면서 연극은 비로소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 늘 지적하고 지시하는 입장이던 찰리가 반대로 니콜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면 되는지를 묻고, 작품 초반 “난 무대에서 못 울잖아”라고 말하며 찰리와의 자리를 피한 뒤에야 울음을 터뜨리던 니콜은 찰리와 나란히 누운 채로도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무대 바깥에서 처음 보는 상대의 얼굴인 동시에, 거울 속 낯설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을 기다리는 건 법정이라는 또 다른 연극 무대다. 이 연극은 어느 한 명이 혼자 연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평하지만, 두 사람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을 맡았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둘 사이에서는 이해할 수 있던 사소한 실수들이 법정에서는 상대의 책임을 추궁하고 부적합한 양육자라고 힐난하는 근거로 돌변한다. 연극에 지쳐 이혼을 결심한 사람이 더 끔찍한 연극에 휘말렸으니, 니콜이 찰리를 찾아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처럼 변호사들 없이 마주한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가면 아래 얼굴을 드러내고 서로에게 거친 말들을 쏟아낸다. 이때의 얼굴을 민낯이나 바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얼굴이야말로 상대의 진심이라고,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가면과 얼굴 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한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의 바닥까지 확인하고도 다시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양육 문제 감정인을 기다리며 찰리는 마치 연극 무대 소품을 연출하듯 화분과 카펫을 들이고, 요리에 능숙한 ‘좋은 아빠’ 배역을 스스로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연신 괜찮다고 연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혼생활 내내 니콜이 했던 종류의 연기였다. 뒤늦게 니콜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이혼에 합의한 찰리는 니콜이 원하던 대로 LA에 직장을 얻고 한 발짝 바깥에서 니콜의 새 삶에 함께한다. 그리고 니콜이 배우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에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가면을 쓰면 불행하고 얼굴을 드러내면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랑(결혼)이 공동연출, 공동주연의 연극임을 기억하면 어떨까. 두 사람이 함께 연출한 연극이라면 무대 위의 연기도 거짓이 아니다. 극중 배우로서 여러 차례 무대에 서는 니콜과 달리, “Being Alive”를 노래하며 처음 무대에 선 찰리의 얼굴 위로 가장 진실한 표정들이 지나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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