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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널목 Oct 26. 2020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이 책을 읽으며 ‘alienate’라는 영단어를 떠올렸다. ‘(못 마땅한) 외국의’라는 의미의 형용사 ‘alien’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 이 단어는, ‘소외감을 느끼게 하다’라는 의미의 타동사다. 이 단어의 어원을 헤아리다 보면 다음과 같은 사고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외국인이 못 마땅하다는 것. 못 마땅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게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영화 <Alien>의 이미지를 경유하면 그 외국인은 어느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침 흘리는 괴물이 되어 있다. 그 괴물은 더럽고 그 괴물은 혐오스럽다. 정부의 낙태죄 개정안, 차별금지법, 샘 오취리와 블랙페이스, 변희수 하사 강제 전역, 숙명여대의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거부 등 우리 사회가 마주한 여러 이슈들에서 마찬가지의 반응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낙태는 살인이다. 동성애자는 더럽다. 샘 오취리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트랜스젠더는 괴물이다…… 그들의 혐오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외국인의 외국인 됨이 선택의 문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국인이라는 범주에 집착하면서 (…)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서 왔고 자기 나라가 있으므로, 내 나라 사람과 다르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 하지만 외국인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 외국인이라는 운명 속으로 추방된 사람에게 그 말은 다르게 들릴 것이다. 외국인으로서의 삶 외에 다른 삶을 택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코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p.72)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되지만 사실 없는, 이곳이 싫으면 언제든 돌아가라고 재일조선인들에게 강요되는 그곳—조선에 대한 설명에 덧붙여진 말들이다. 괄호 안에 ‘조선’ 대신 ‘정상성’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문장은 “내 몸은 나에게 강요된, 벗어날 수 없는 장소이다”(p.23, 재인용)라는 푸코의 말을 연상시킨다. 일본 정부가 조선이라는 상상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사람자격을 영구히 유보하듯, 정상성 범주 바깥의 몸을 교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주인의 사람자격을 영영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누군가의 사람자격에 이처럼 조건을 붙인다면,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고 괴물로 여기는 것을 사회적으로 당연시 한다면, 그 조건은 한없이 더 작은 상자가 튀어 나오는 요술 상자처럼 점점 더 세밀해질 뿐이다. 중고등학교에서는 그가 어느 아파트에 거주하는지가 사람자격의 기준이 된 지경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우리’와 다른 ‘일부 소수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든 소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술 상자의 가장 안쪽에 남은 미국 국적의 키 크고 잘생기고 젊고 건강한 고학력 부자 백인 남성조차 말이 통하지 않는 서울 한복판 떠들썩한 술자리에서는 소수자가 될 것이다. 그가 늙어 노인이 된다면?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된다면? 더 나아가 이 책자의 저자가 지적하듯, 우리 사회에서는 번듯한 대학을 나와서 번듯한 직장을 얻어서 번듯한 이성-배우자와 결혼하고 번듯한 자식을 낳아 번듯하게 키우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이성애-가부장제에 충실히 복무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아직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검열하고 모순을 지적하는 일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그런 일이 대체로 그렇듯, 그 발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크고 작은 모순을 갖고 있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p.214) 그러므로 문제는 다른 사람의 정체성에서 발견되는 모순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때그때 달라지는 환대의 조건들이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몸에 새겨진 정상성의 표지가 아니라, 상호간의 절대적 환대다. 사람자격이 한 줄로 길게 이어진 도미노라면 절대적 환대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의 도미노가 동시에 일어설 것이고, 조건적 환대 아래에서는 언젠가 내 도미노까지 차례차례 쓰러질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가 ‘우리’라고 선을 긋고 바깥의 누군가를 거리낌 없이 괴물 취급하는 이에게서 사람의 면모를 찾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때 그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오히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먹잇감에 군침 흘리는 영화 속 괴물의 이미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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