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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a Jan 17. 2021

화이트 와인에선 공항의 맛이 난다

주당이라고 모든 술을 좋아하는것은 아니다. 소주파, 맥주파, 양주파 등 각자가 전문으로 하는(?) 주종들이 있다. 막걸리 대학교를 나온 나는 학교의 명성과는 맞지 않게도 오로지 맥주파였다. 두 번의 사발식으로 막걸리의 걸죽한 숙취 트라우마가 생겨버렸고, 소주는 멋모르고 마시다 본의 아닌 사고를 많이 치게되어 어느 순간 나는 맥주 외길로 정착하게 됐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소주나 소맥이 대세인 회식에서 나는 홀로 맥주를 꿋꿋히 지켰다. 내가 마시는 맥주의 양이 그들의 소주 도수와 가히 비례했기에 선배들은 이런 나에게 굳히 소주를 권하진 않았다.  


그래서 와인은 사실 내가 별로 좋아하는 술은 아니었다. 물론 대학생이 흔히 마실법한 술도 아니거니와 회식에서도 주류 주종이긴 힘든 술이기 때문에 굳이 찾아마시지 않고서야 와인을 마실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와인은 외국에 잠시 머무를때 한번 극악의 숙취를 안겨준 술이라 별로 기억이 좋지도 않았다.

내가 와인의 맛을, 그것도 화이트 와인을 알게 된 것은 런던에 처음 '혼자' 출장을 간 2015년이었다. 어쩌다가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된 티켓을 받고서 생전 처음 가보는 국적기 항공사 라운지로 향했다. 그때 라운지에 들어서자 마자 나의 눈을 처음 사로잡았던 것은 바에 즐비한 각종 술의 향연이었다.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양주와 각종 병맥주를 무제한으로 마실수 있다니, 그리고 심지어 치즈를 비롯한 각종 안주들도 준비되어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술꾼의 천국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항공사쪽에서는 가장 싫어할 것 같다)

 

어차피 비행시간은 9시간이 넘는데다 도착하면 바로 저녁이었기 때문에 일정이 없었다. 혼자 첫 해외출장과 첫 라운지 입성에 들뜬 나는 일단 제일 비싸보이는(?) 화이트 와인 하나를 집어들어 잔에 따랐다. 막 출발하려는 비행기가 달리는 활주로 뷰를 보며 화이트 와인을 한모금 마신 그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나는 비록 대리급 실무자 '나부랭이'였고, 9시간 걸리는 런던을 2박3일치기로 다녀오는 숨막히는 일정이었지만 묘하게 여유로움을 선사하는 기분이었다.


이후로도 영국과의 전시를 위해 출장을 갈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히드로 공항은 맥주의 나라답게 대낮 아닌 아침부터 공항 펍에서 맥주를 마시는 영국인들이 많다. 그 사이에 홀로 있던 오이스터바가 항상 눈에 띄었는데, 혼자 온 양복입은 외국인들이 와인과 굴을 즐기는 모습이 항상 부러웠던 기억이 났다. 뭔가 '성공의 맛을 느끼는 자'들 같았다. 그래서 나도 이번 출장때는 한번 그곳에 앉아보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굴에 비하면 말도안되게 비싼 가격이지만, 여섯개에 이만원쯤 하는 석화를 주문해봤다. 그리고 화이트 와인 한잔을 주문했다. 삼일 간 했던 미팅들의 결과를 정리해 보고해야 하는 서류 정리가 열 페이지쯤 남았지만 빡센 출장을 끝낸 나에게 주는 한잔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맛봤던 화이트 와인과 석화의 조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석화가 이렇게 향긋했다니. 그리고 조금 웃기지만 어쩐지 나도 '성공의 맛(?)'을 향해 한걸음 다가간 기분이었다.

그 뒤로 2018년 이직을 한 회사에서는 두달에 한번 꼴로 해외 출장이 있어 공항을 수도 없이 가게 됐다. 출국 때는 여유 없는 마음으로 내리자마자 할 미팅 서류들을 검토하기에 급급했지만, 출장을 마무리 한 귀국길에는 항상 공항에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귀국길에 라운지에서 마시는 화이트 와인 한잔은 나에게 하나의 의식과도 같이 자리잡았다. 이 시큼하고도 달달한 한잔이, 밥먹을 시간도 없이 전쟁같은 출장을 치러낸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홈술을 많이 하게 됐다. 보통 편의점에서 파는 맥주를 주로 마셨는데, 요즘 편의점에 와인 컬렉션이 꽤 늘어났다. 그래서 어느날 편의점에서 맥주 대신 화이트 와인을 한번 사와봤다.

오목한 잔에 투명한 와인을 찰랑 따라 한모금 맛본 순간, 마치 갑자기 공항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이고 공항에 가본지도 꽤 오래됐었는데, 그날 그 한잔의 와인이 갑자기 나의 모든 출장과 공항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느낌이었다.

그날 그 화이트 와인에서는 공항의 맛이 났다.


해외 여행이고 출장이고 외국에 간다는 것이 어느새 너무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 조차 못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출장 많이가던 회사에서 나와 조금 다른 일을 하게 됐다. 힘들어 죽겠다던 그때는 매번 전쟁에 임하는 장수의 마음으로 출장에 임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의 낭만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 내게 화이트 와인은 해외 출장과 여행의 향수를 달래는 술이 됐다. 언제 다시 공항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행가서 처음 들은 어떤 노래는 지금 들어도 그 때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래서 이 와인 한잔에도 나의 그 시절 공항의, 출장의 기억이 새겨졌나보다. 마치 음악에 새겨지는 순간의 기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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