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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Dec 27. 2023

자살 생존자가 말하는 자살

죽기 전에 이 글을 보세요.

놀랍거나 혹은 놀랍지 않거나. 대한민국의 두 번째 이름은 바로 ‘자살 공화국’이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십 년 넘게 하고 있다. 오죽하면 지난 팬데믹 기간에도 국내에서는 COVID-19로 죽은 사람보다 자살자 수가 많았을까.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자살 사망자가 많은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하여 누구보다 자살과 가까이 있는 사람인 내가 자살의 고통과 자살유가족으로 사는 일이 어떤 일인지 이야기하려 한다. 아마 사람이 왜 죽고 싶어 하고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만큼 살에 닿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는 ‘경험’에 있다. 경험만큼 강렬한 학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호모사피엔스고 현생 인류는 학습이 가능한 동물이기에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맛보고 알 필요 없다. 남 하는 거 옆에서 보기만 해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어쩌다 자살 전문가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과 남겨진 사람의 심정을 설명해 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많이 읽으시기를, 특히 서이초 선생님 사건을 접하고 조금 더 인내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윤 모 씨와, 이태원 참사 159번째 피해자를 두고 마음을 굳게 먹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입을 턴 한 모 씨에게 바치고 싶다. 부디 그들에게 바람결에라도 이 마음이 가 닿기를 바라며.     


인간은 왜 자살할까

자살의 동기는 프로이트 선생께서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무의식에 파괴 욕구를 지녔으며 그 욕구가 외부가 아닌 자신을 향할 때 자해 또는 자살을 한다고 했다. 또 정신과 의사 미스터만 Mann 선생님 역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존재가 취약해질 때 자살 욕구를 느낀다고 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살고 싶은 욕구만큼 죽고 싶다 얘기다. 물론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 중 인간만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침팬지나 고래, 심지어 더러는 개도 자살을 한다. 그러나 인간만큼 자살을 많이 하는 동물은 없다. 인간의 자살에는 분명 특이한 모먼트가 있다.


자살 (유가족) 생존자가 된다는 것

스무 살 봄에 나는 오십을 갓 넘긴 아빠를 자살로 잃었다. 어제까지 살아있던 아빠를 병원 영안실에서 다시 봤을 때의 충격은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장례 때 입관에서 본 사람은 내 아빠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죽기 전날까지 나하고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가 다음 날 입을 반쯤 벌리고 차가운 철제 상판에 누워 사지를 쭉 뻗고 있다니, 그냥 내 눈에는 곤히 자는 것처럼 보였다.


한데 이날 이후로 내 입에선 아빠라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 단어는 어쩐지 먼 옛날에 삼켜버린 칼날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그 후 나는 애초에 아빠라는 사람이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아빠의 자살은 우리 가족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아빠의 형제자매 엄마의 형제자매가 서로 언성을 높였다. 남겨진 가족들은 툭하면 자살 시도를 했다. 특히 막내딸로 아빠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내가 심했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을 이럴 때 하는 걸까. 아빠가 세상에서 사라진 그해 6월, 나는 삼풍 백화점 지하 1층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르고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죽었다. 참혹했다. 누구는 손가락만 찾았고 누구는 몸통만 찾았다고 했다. 운 좋게 목숨은 구했지만, 나도 안 다친 데가 없었다. 무너지는 백화점 지하에서, 나는 죽음에 대해 한 발짝 더 파고들었다. 고스톱으로 치면 피박에 광박을 쓴 것 같았다고 할까.


이날 이후 나는 세상으로 난 문을 전부 꼼꼼하게 닫아걸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어린 나이에 나는 죽음에 천착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차하면 죽고 싶었다. 연인하고 헤어져도 죽고 싶었고, 술 마시고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주접을 떨어도 죽고 싶었고, 회사에 가기 싫은 날에도 그냥 죽고 싶었다. 그러다 결국 제대로 된 자살 시도를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요즘은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죽고 싶지 않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어느 날부터 '남들처럼 살자 유난 떨지 말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요즘은 어지간하면 죽고 싶지 않다. 이렇게 되기까지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다.


죽고 싶을 땐 뭘 하면 좋을까

마지막으로 병이 도진 건 2019년 겨울에서 2020년 봄으로 오던 시기였다.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어느 날 갑자기 미치도록 죽고 싶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가방에 대충 옷가지 구겨 넣고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그때 내가 왜 응급실에 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럴 땐 뭘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그냥 아프니까 무조건 응급실에 갔다.


한데 하필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죽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데스크에 계신 선생님께서 나는 열이 나지 않으므로 입원시킬 수 없으니 그냥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정 입원하고 싶으면 가까운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음성 테스트 결과를 받아오라고 했다. 아니 내가 그럴 정신 있으면 응급실에 왜 오냐고 그 얘기를 듣고 답답해서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을 구르며 울어 버렸다. 물론 이해 안 될 거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절박했다. 이대로 밖에 나가면 정말이지 지하철로 내려가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경험이 없는 분들은 이해가 잘 안 가시겠지만 실제 이런 식의 충동으로 많이 자살을 한다).


내가 소란을 피우자 병원 경호팀이 왔고 경호팀의 연락을 받은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내게 일단 함께 파출소로 가면 가까운 정신 병원에 당장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고 순순히 파출소에 가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당시엔 코로나가 한창이어서 경찰들도 병원을 연결하지 못했다.


어찌어찌 내 친구에게 연락이 닿았다. 얼마 후 친구가 버선발로 나를 찾아 우리 동네 파출소로 왔다. 친구는 새파래진 얼굴로 나타났다. 괜찮냐고 하더니 아무 말 않고 울기만 하는 나를 달래어 일단 집에 가자 했다. 희한했다. 어쩐 일인지 친구를 보자 안심이 되었다. 친구 손을 잡고 고분고분 파출소를 빠져나왔다. 친구는 서랍장에서 정신과 약을 찾아 내게 먹이고 진정시켜 재운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내가 계속 다니던 분당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평소와 다르게 친구와 함께 나타난 날 보고 놀란 선생님은 급성으로 우울증이 오는 경우 나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종합 병원에 입원하지 않길 잘했다 했다. 어차피 내 병은 뻔한데 괜히 입원해 이런저런 검사하며 비싼 입원비 내지 말고 차라리 그 돈 친구한테 주고 친구더러 한 달간 돌봐달라고 부탁하란다. 입원비가 한 달에 얼마나 나오냐 물으니 선생님이 말하길, 돈 천만 원은 우습지.


그 소리에 친구랑 나랑 놀라 마주 보고 웃었다(실제로 천만 원이 나오는지는 모른다. 아마 병원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금융 치료는 효과적이었다. 친구는 내 사정을 남편에게 말하고 여행 가방에 짐을 싸 우리 집에 와 나와 함께 일주일간 있었다. 이제 괜찮으니 집으로 가라. 너는 애도 있지 않냐 했지만 친구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친구의 돌봄을 받으며 지냈다. (물론 돈 한 푼 안 받고)


그러는 사이 내 증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친구를 보내고 선생님께 다시 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혼자 살면 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니 아무 하고나 같이 살라고 했다. 싫다고 하니 그럼 개라도 키우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벌써 3년이 지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생님의 '개' 처방은 탁월했다. 개와 함께 살기 시작하자 감정이 더 이상 널을 뛰지 않았다. 일단 당장 책임져야 할 생명이 눈앞에 있으니 예전처럼 원 없이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으며 망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키우는 개는 매일 밖에 나가 배변을 하는 실외 배변 견이다. 그러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매일 두 번 이상 무조건 나가 걸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놀라울 정도로 내 마음은 진정됐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혹시 죽고 싶거든 오랜 기간 혼자 있었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길, 만약 그렇다면 서둘러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시길. 하다못해 개라도 만나시길.


물론 모두에게 개를 추천하는 건 아니다. 회피형 우울의 경우에는 새로운 생명이 주는 부담이 오히려 병을 악화시킨다고 한다. 그러니 이 또한 반드시 전문가와 상의하길 권한다.

자살 생존자가 된 후 알게 된 것들

대부분의 정신과 질병은 유전과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한다. 불행히도 우리 집은 양쪽 모두 정신과 병력이 있다. 그 결과 우리 가족에게 이른바 잭팟이 터져버렸다. 양가 모두 합쳐 친인척 중에 자살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 무려 넷이다. 내 형제들은 조현과 조울 망상 경계성 장애 증상을 두루 갖췄다. 그러니 내가 여태 병원을 오가는 신세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그러니 분명한 건 내가 인내심이 없어서 마음이 약해서 이딴 병으로 고생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자살 유가족이 되고 나면 일단 한평생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아무리 주변에서 아니라고 해도 그 모든 게 내 탓같이 느껴진다.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잃은 이른바 자살 생존자들은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지독한 고통을 받는다. 조금만 빨리 전화할 걸, 혼자 두지 않는 건데 하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들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에피소드에 7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극 중 준기는 자살로 아내를 잃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본인도 자살 시도를 한다. 이처럼 많은 자살 생존자들은 그때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하는 생각에서 꽤 오래도록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라고 한다.


자살시도를 하며 깨닫게 된 것들

나 역시 그간 여러 형태로 자살 시도를 했다. 언제 한 번은 큰맘 먹고 아파트 옥상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간 적이 있다. 문이 잠겨 있어 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통곡하고 터덜터덜 내려왔다. 당시 나는 3층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여름에 어렵게 번개탄을 구했는데 제대로 불을 피우지 못해 버린 적도 있다. 큰맘 먹고 소주 두 병을 사서 양화대교까지 갔는데, 넋 놓고 강을 바라보는 내게 지나가던 아저씨가 자꾸 술 마실 거면 자기랑 같이 합정 넘어가서 마시자고 말을 걸어 그 사람하고 실랑이하다 끝내 버스 타고 집에 온 적도 있다. 치사량의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몇 번에 걸쳐 소주와 꾸역꾸역 먹었는데 이번엔 때마침 집에 반찬 가져다주러 온 오빠에게 걸려 병원에 실려 가서 중환자실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나 같이 자살에 실패하는 경우가 오히려 흔하다고 한다. 한 번에 자살에 성공하는 경우가 되려 드물다고 말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누가 자살 시도를 하면 이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자. 안 되면 강제로 보호 병동에라도 입원이라도 시키자. 죽고 싶은 마음도 어찌 됐든 누군가에 의해서든 나처럼 한풀 꺾이면 얼마간 또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또 우리 아빠처럼 죽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단박에 잘 죽는지 모르겠다. 운명의 장난까지도 운명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최근에 인터뷰한 이태원 참사 159번째 희생자 재현이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재현이 케이스는 더 안타깝다. 아이 얘기를 들을수록 이 사회 모두가 공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이태원 참사라는 끔찍한 사건은 왜 생겼는지, 친구를 잃고 겨우 살아남은 아이한테 누가 그런 몹쓸 소리들을 했는지, 또 애한테 어른이 소주는 왜 팔았는지, 미성년자가 모텔엔 어찌 들어간 건지. 그러니 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어른답게 굴었더라면, 아니 적어도 법이라도 지켰더라면 그런 끔찍한 죽음은 막았을 텐데 싶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프다.

죽지 말고 살아있자 

상담을 다니며 깨닫게 된 게 있다. 죽고 싶을 때마다 나는 절절하게 외로웠다는 사실이었다. 정작 나 자신은 고립된 생활을 오래 해서 그게 외로운 상태라는 걸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밖에 나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아니 혼자 살기 어렵다. 이는 우리의 DNA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현생 인류는 무려 26만 년간 무리 지어 살던 동물이다. 그러니 가급적 혼자 있지 말자. 마음이 어두워질 거 같으면 미리미리 나가서 놀자.


친구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내 경우엔 뜻밖에도 보육원에 봉사 다니면서 만난 우리 수녀님들이 내게 가장 긴밀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요즘 같은 시대는 같은 추억이 없어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당근만 뒤져 봐도 동네 친구 뚝딱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친구부터 만들자.


내 처지가 초라하고 우스워도 상관없다. 그냥 생판 모르는 남을 이용하자. 내 경우엔 사람들 앞에서 내 상처를 드러내고 보여줄수록 점점 자유로워졌다. 오히려 감추려고 애쓸 때가 훨씬 힘들었다. 그러니 힘든 시기에 있는 그대들. 부디 용기 내어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 보기를, 괜찮다. 내가 해 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처음엔 남들 다 보는데 앉아 똥 싸는 기분이었는데 이것도 자주 하다 보니까 뭐 별거 아니더구먼.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시절을 다 겪어 왔더니, 지금은 몹시 안온하다는 사실이다. 병이 깊을 때 나는 지금 내 나이쯤엔 집도 절도 없이 술에 절어 서울역 앞에서 신문지를 덮고 잘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미래의 걱정을 앞당겨 살지 말자.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끝으로. 자살은 정말이지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상처라는 말을 하고 싶다. 혹자는 “어떤 자살”은 가해라고 하던데, 아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자살은 그저 죽는 사람이 제일 피해 보는 일이다.


그러니 억울해서 남의 가슴에 대못 밖으려고 죽겠다는 사람 있으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미 나를 괴롭힌 사람은 나 하나 죽는다고 해서 더 괴롭지 않다. 역사를 보라. 잔인하게도 산 사람은 계속 산다. 죄책감 없이. 그러니 살자. 나보다 나쁜 놈들도 저렇게 버젓이 사는데 왜 죽어. 졸지 말고 살자.


+ 공교롭게 오늘 배우 이선균의 부고를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가족들의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생각한다. 혹여 마약을 했으면 끊으면 될 일이지 그게 무슨 중죄라고 이 난리일까. 마약을 유통시킨 사람을 처벌해야지. 몹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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