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 My Flient
회사는 타이틀을 벗고 광야에 혼자 존재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세상에 내보였던 그 시간이 궁금합니다. 회사에 속해 직급을 달고 있었던 그리고 지금 ‘광야’에 있는 지금을 이야기 해주세요.
To - My Flient
질문을 받고 곱씹어 읽을수록 저를 위해 요리를 하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 초대해 주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배불리 맛있게 먹는 것이 손님의 도리라면 그 도리를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오해가 없게 잘 전달하고 싶어 얼마나 몇 날 몇 일을 고민하고 고치는 시간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보니 답장이 늦었네요. 그래도 제 얘기에 귀 기울여 주실거죠?
지난 13년을 돌아보면 참 욕심 많은 아이가 보입니다. 선배들에게 인정을, 동기들 속에서 특출함을, 후배들에게는 넉넉한 마음과 뾰족한 업무능력을 갖춘 든든한 선배이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제 욕심에 지쳐 떨어져 나가기도 했고, 나아가는 동력도 되었고 ..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을까요? 조심스런 마음이 들지만, 가진 능력보다 과분한 기회를 받았던 애증의 첫 조직이었습니다.
저희의 찐한 대화 속에서 ‘지난 13년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드린 적이 있는데 이 기회를 비로소 다시 마주했으면 하는 프라이언트의 마음이 느껴져 긴 시간을 마주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울타리 안에 있던 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니?’라고 되묻고 또 되물었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인 큰 숙제가 울타리 안에 있던 시절 온전히 덮어버렸음을 .. 일하는 자아보다는 삶을 압도하고 있었던 문제에 몰입되어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주어진 감사한 시간과 기회들을 더 고귀하게 여기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터놓는 것이 참 조심스럽고 아픕니다. 스스로를 너무 가엽게 여기고 싶지도 않고, 삶에서 진정 벗어나 버린 문제일까?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하니깐요. 그럼에도 지금 광야의 소중함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네요.
입사와 퇴사의 긴 시간동안 제 삶을 누르고 있는, 해결점과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문제가 있었는데요. 제가 갖고 있는 문제라면 오랜 시간이 걸리게 두지 않았겠지 만요. 가족의 문제는 참으로 손쓸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제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유년시절의 아버지는 젊고 반짝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노력과 성공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고요. 제 욕심의 DNA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씨앗이더라고요. 그만큼 뜨거운 20대와 30대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잘 소개하고 싶어 잠시 어린시절을 이야기를 해볼게요. 참으로도 기구한 인생이시거든요. 그의 아버지는 오래전에 집을 나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셨고, 시골에서 홀어머니와 누나 함께 소박한 3식구를 이끌어가야 했던 어린 가장이었으니깐요. 아비없는 그를 안타깝게 여겨 집안 어르신들의 아픈 손가락이었지만 아비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나봅니다. 그리고 공부도 곧잘 하셨다고해요. 대학을 진학하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평생 일궈오신 논밭과 집을 팔아도 4년 학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머금고 대학을 포기했고, 더욱이 당시 집안 어르신 중에 6.25 때 북을 지지하여 집안이 연좌제에 묶여 대학을 진학해도 큰 뜻을 펼칠 수 없음에 좌절하셨다고 합니다. 빈 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가까스런 노력으로 당시 영화진흥공사에 취업을 하셨다고 해요. 그렇게해서 영화업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셨어요. 80-90년대 우리 아버지들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아시죠? 죽을 힘을 다해 앞만 보고 달리셨고, 큰 성과들도 많이 이루셨었죠. 그런데 IMF가 시작되면서 모든 영광은 멈추고, 매년 꾸준히 이렇게 꾸준히 가세가 기울게 되더라고요.
얼마전 읽었던 책 속에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사는 일이 마음 같지 않아 술에 취한 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한 남자의 일생'이라는 구절을 보고 저희 아버지가 떠오르더라고요. 맞아요. 제가 입사하기 전부터 퇴사하기 까지 그 긴 시간을 그렇게 보내셨거든요. 참으로 길죠? 어린시절에 가정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여리지만 자존심 센 아이가 자라 맨 손으로 딛고 일어나보려고 애썼지만, 성공의 내리막 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게 되었으니깐요.
스스로 우울하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퇴근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가면 온기없이 마음을 좀먹는 기운들이 제 발목을 잡더라고요. 그 시간은 엄마와 서로 의지하면서 버텨내던 시간이었네요. 독립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를 두고 그 집에 나오는 것이 죄스러워 꾸역꾸역 보내다 ‘이러다 죽겠다’싶은 나이쯤에는 독립을 했거든요. 아직도 생각나요. 용달에 이삿짐을 싣고 가는 차안에서 엄마와 함께 손잡고 울었던 그 길을. 이렇게 적고 보니 우리 엄마 그 시간들을 씩씩하고 버텨줘서 감사하기만 합니다.
기적같이도 저의 결혼과 출산이라는 계기로 좋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고 싶으신건지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계세요.
제게 물으셨죠? 무언가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요. 그 힘은 지금의 감사함 때문입니다. 긴 터널에 있던 시간동안 하늘에 누군가가 있다면 제 얘기 좀 들어주길 했던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는요. 정말 잘 할 수 있는데요. 제 자신 하나만 생각하고 달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정말 잘 해낼 수 있어요. 제게도 그런 기회를 주세요.” 라고요. 지금 그 기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경건해져요. 그래서 스스로가 흐트러지거나 타협을 하고 싶은 날엔 기도를 생각합니다.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니깐요.
또 무너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새깁니다. 마음에 푸른 멍이 깊게 남겨진 배움은 잊으면 안되니깐요.
무엇이 되고 싶다가도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다 내려놓고, 오늘 하루를 성실히 보내자했던 시간 속에 기록걸즈도 함께 했네요. 주어진 것에 담담히, 배운대로 묵묵히. 저의 20대와 30대를 관통했던 그 아픔으로부터 빗겨있는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간이 매우 귀하고 소중합니다.
또 ‘지금 광야에 있다.’한 표현도 드넓은 광야에 아직 무엇하나 이룬것이 없더라도 터널을 벗어나 오롯히 자신만 생각하며 맘껏 뛰어놀고 자유롭게 방황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제게 많이 허락되지 않음을 알기에 하루하루를 더 귀히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