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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Dec 10. 2022

고독한 사장님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둘러 셔터를 올렸다. 우리는 화물칸이 비에 젖지 않도록 트럭을 창고 안쪽으로 반쯤 걸쳐 세우고 나서야 비를 피했다. 나는 흐르는 빗방울을 팔로 쓱 닦은 뒤   방수포를 펴고 전표를 살폈다. 고객님 댁에 설치할 에어컨이 배송 전부터 비를 맞아서는 안 됐으므로. 오늘 예약 건은 벽걸이 하나와 멀티 하나였다. 거리도 멀지 않아 늦어도 오후 두 세시면 끝이 날 것 같았다. 매일 그랬든 창고 한편에서 초록색 끌차를 툭툭 치며 물건을 찾고 있는데 팀장님이 잠깐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리곤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팀장님의 시선은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천히 두 번째 담배를 피운 그는 꽁초를 땅에 비벼 끄면서 나에게 말했다.


  “안되겠지?” 


  질문의 형식을 띈 문장이었으나 대답은 필요 없었다. 오후에나 상륙한다던 태풍은 이미 세찬 바람과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일을 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오늘은 운동했다고 생각하고 밥이나 먹고 가자’는 팀장님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한편에는 출근에 쓴 시간과 차비가 두둥실 떠올랐다. 오늘 일당까지는 받아야 이번 달 차비랑 밥값을 채우는데. 일하지 않으면 벌지 못하는 몸이니 논다고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프리랜서에겐 육체적인 안락함보다 불규칙한 소득이 주는 불안감이 더 컸다. 

 그때였다. 팀장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에어컨입니다. 오늘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불어서요. 출고가 어려울 것 같네요.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팀장님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고객님께서 사무실 이사를 왔는데 너무 덥다고 오늘 무조건 설치해달라고, 비 안 맞는 곳이니깐 와달라고 했단다. 나는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실외기를 실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차비와 밥값만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한 건이라도 설치를 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우리는 벽걸이 에어컨 하나를 달랑달랑 실은 채 태풍을 뚫고 공단 근처의 사무실로 향했다. 차고지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파란 트럭은 비 사이로 길을 냈고, 창문의 와이퍼는 쉬지 않고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우리처럼.


  현장에 도착하니 전화로 들은 것과 상황이 조금 달랐다. 사무실은 실내에 있지만 실외기가 설치될 장소는 외부에 따로 분리되어 있어서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다른 사무실의 실외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쉽지 않은 작업이 될 터였다. 비가 와서 바닥이 미끄럽기도 하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위험하다고, 내일 설치를 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다시 한번 고객님에게 상황을 설명했으나 의사가 완강했다. 그래서 위험수당이 포함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이미 왔으니 오늘 설치해달라고 했다. 벌금이 요금이 아닌 것처럼, 위험수당 또한 목숨값은 아닌데. 3만 원을 내고 나의 노동을 사는 것이지, 나의 목숨을 사는 것은 아닌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처럼 나의 일터는 존중의 경험이 자라나기에는 척박했고, 동시에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업무만이 아니라 고용의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다니며 처음 시작한 콜센터에서부터 나는 프리랜서, 그러니까 개인사업자로 일을 해왔다. 고용 담당자는 월급에서 3.3%의 세금을 뗀다고 했고, 연말에 다 돌려받을 수 있다고만 설명했다. 회사가 제공한 사무실에서 회사의 지시를 받고 회사를 위해 일하지만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물론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문제가 있어 전화를 건 고객에게는 그 회사의 직원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계약을 할 때는 개인사업자였지만 일을 할 때는 회사를 대신해 사과하고, 심한 경우에는 욕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응대했다. 한 시간에 몇 콜을 받았는지, 후처리에는 얼마나 시간을 썼는지, 화장실에 몇 번 다녀왔는지 모두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됐고 콜 순위가 한 달에 한 번씩 공지됐기 때문이다. 그 순위를 기준으로 인센티브를 받았다. 게다가 재계약을 확신할 수도 없었고, 한 번의 실수로 잘릴 수도 있는 신분이었기에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상담사들은 치열하게 전화를 받았다. 끝없이 울리는 벨소리 속에서도 상담사들의 목소리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하게 된 일은 데이터 라벨링이었다. 여기서도 나는 개인사업자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떠오르는 뉴딜 일자리, 플랫폼 노동자 등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주었으나 법적 지위는 같았다. 여전히 일도, 수입도 고정적이지가 않았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 여기저기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그러다보니 일이 있을 때면 책상에서 밥을 먹으면서 일을 하기도 하고, 잠을 줄여가며 새벽까지 작업을 하기도 했다. 지인들의 만남은 모두 뒤로 미루고 주말에도 빼놓지 않고 일했다. 이처럼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은 ‘지금 아니면 안 된다, 벌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조급함을 불러 일으키고, 상시적인 생존 위협으로 이어져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하루는 택배 노동자 파업 현장을 지나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택배기사들 본인이 더 벌고 싶어서 일을 더 하는 건데 무슨 불만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한 만큼 벌게 된다는 건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업무 시간과 강도를 본인이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처럼 보이지만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지 않기에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된다. 언제 다른 일을 하게 될지, 언제 소득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분명히 어딘가에 고용되어 회사나 기업을 위해 일하고 있음에도 프리랜서,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다. 과로사가 발생할 정도로 고강도의 일을 하면서도 ‘본인이 선택한 직업이다’,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편견 섞인 말까지 감수해야 한다. 


  코로나 펜데믹과 함께 일의 형태와 개념이 빠르게 변했다. 불가능하다던 재택근무가 도입됐고, 비대면 서비스들이 활성화됐다. 하지만 법과 시스템은 그대로다.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노동자는 점점 많아졌다. 지금도 배달라이더, 돌봄노동자, 감정노동자 등 수 많은 직업군들이 개인사업자로 법의 테두리 밖에서 일하고 있다. 때로는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주말 콜센터 일을 할 때 월 근로시간을 59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근무시간 60시간이 넘지 않으면 단시간 근로자로 구분되어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고용보험 가입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또한 주말 근무자는 회사에 있는 종이컵 같은 비품이나 커피 등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 분명 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고용의 형태에 따라 미묘한 차별들이 벌어졌다. 내가 바라는 건 정규직이 되어 마음껏 비품을 쓰는 게 아니라, 노동자 모두가 자유롭게 비품을 쓰는 일터였다.


  여름엔 에어컨 설치를 하며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 일했다. 에어컨이 있다 하더라도 미지근한 바람만 힘없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나를 찾았다는 건 에어컨이 없어서 새로 설치를 하거나 고장이 났다는 것이므로 시원한 환경에서 일할 수 없었다. 더운 곳을 시원하게 만드는 게 우리의 일이므로 기꺼이 뜨거운 곳으로 들어가 배관을 새로 용접하고 가스를 주입했다. 땀과의 사투를 벌이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한 바람이 힘차게 나왔다. 그러면 작업은 끝이다. 하지만 그 찬바람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다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 했다. 우리는 모두 사장님이므로 끊임없이 움직여 나의 노동을 팔고,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무거운 실외기를 건물 외부에 내려놓는 것도, 땀이 들어간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벌을 서는 모습으로 에어컨을 들고 서 있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확신 할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는 현재의 나를 흔들어 놓았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인근에 지하철역이 생겨서 몇억이 더 올랐다는 입주 아파트에 에어컨을 설치하면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어도 이 집이 오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 부러웠다. 마냥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사무실에서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는 모습이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지 못하고 항상 달렸다. 더 뜨거운 곳을 찾아 열심히 일하면, 남들보다 많은 땀을 흘리면 마냥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콜센터, 방송국, 백화점, 화장품 샵, 데이터 라벨링, 에어컨 설치 등 끊임없이 일을 해왔다. 그곳에서 나는 항상 근로 기간이 정해진 계약서를 썼다. 처음에는 1년, 6개월이던 것이 2~3개월 혹은 프로젝트 단위로도 나눠졌다. 일은 점점 더 잘게 쪼개졌고 우리에게 사장님이 될 것을 권한다. 원하는 만큼 일하고 원하는 만큼 벌라고 속삭인다. 마치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와 선택권이 주어진 것 같지만, 근로환경 개선 등 회사의 의무는 최소화하면서 업무에서 발생하는 책임을 개인이 지게 되는 구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두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맺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직군에 따라서 분명 개인사업자로 근무하는 게 더 적합한 경우도 있다. 다만 계약의 형태와 관계없이 사람으로, 노동자로,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함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는 것을 기반으로 할 때 말이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비정규 노동자를 구분짓는다. ‘아르바이트’, ‘알바생’, ‘정규직’이라는 언어는 법적 개념이 아니다. 법률에서는 근로 기간이 정해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바 혹은 계약직과 정규직을 다르게 인식한다. 계약직과 정규직을 다르게 여긴다. 같은 일을 한다면 같은 대우를 받고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지만 계약 형태에 따라 임금과 복지 등에서 차이를 둔다. 그리고 그것이 공정하고, 정당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은밀하게 스며든 차이를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겨울 초입이다. 나는 다시 2.5개월이라는 단기 계약직으로 데이터 라벨링을 하며 삶을 꾸리고 있다. 업무는 재택근무로 이뤄진다. 업무를 할 수 있는 공간, 업무에 필요한 PC, 인터넷 그 어떤 것도 제공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 그걸 당연시 여긴다. 게다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임을 알기에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말을 걸지 않는다. 일도, 사람도 모두 뚝. 뚝. 끊어진다. 마치 혼자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다. 자칫하면 가라앉을까 두려워 발길질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사장님이니까. 외롭고 독하게 살아왔으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누군가 손 내밀었을 때 맞잡을 수 있도록. 그땐 우리 모두 외롭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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