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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진 Mar 25. 2024

어두운 들판 끝에도 삼포는 있다.

「삼포 가는 길」, 황석영, 1973

꽃은 아름답고, 열매는 성하나


미추홀 1학년 여러분, 용비어천가에 대해 알고 있나요? 세종 29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 2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니,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가 많이 성하다.’ 그 후 500년이 지나 1970년대를 맞이한 한국 경제는 실로 풍성한 꽃과 열매를 맺었어요.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계획(1962∼1971)을 추진하는 동안 연평균 8.6%의 고도성장을 달성하고, 경제규모는 3조 4191억 원으로 11배 이상 늘어나며,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61년 82달러에서 1971년에는 289달러로, 1977년에는 1천 달러를 넘어서는 호황을 누립니다. 그러나 화려했던 산업화의 이면은 심각했습니다. 극단적인 도시화로 농어촌은 해체되었고, 도시빈민, 농민, 노동자, 호스티스 등과 같이 기존의 공동체적 삶에서 완전히 뿌리 뽑힌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소외되었지만, 정신적으로 기댈 곳 없는 인간 소외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빈번히 사용된 말이 산업전사, 수출의 기수였어요. 표현만큼이나 경제 성장 우선주의 아래 노동자들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처럼 산업화는 표면적으로는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성했으나, 뿌리인 민중의 삶은 파헤쳐지는 모순이 나타났죠. 그래서 1970년대는 우리에게 두 가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상징으로 표현하자면,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이라고 할까요.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전화(戰禍)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한다면, 그 해 11월 13일에 일어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간소외를 드러내니까요.



경부고속도로와 전태일, 1970년대의 두 얼굴 가운데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주목합니까? 전태일은 떠나고 없고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가로지르며 생동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는 자연스레 후자를 더 유의미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1970년대의 명암을 반추하며 21세기의 자리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헤아려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삼포 가는 길’을 읽는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소설은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 선 영달의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새벽이란 시간이 쌀쌀함을 더하지만 무엇보다 갈 곳 없어 고민하는 그의 처지가 더욱 시리게 다가옵니다. 이 감정을 아직 어린 고등학생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요. 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는 미추홀 학생이라면 조금은 가능할 겁니다. 태어나 처음 집을 떠나서, 낯선 이와 삼시세끼를 함께 하며, 숨을 곳이 없는 기숙사 생활은 예상보다 녹록치 않죠. 이를 버틸 수 있는 것은 어김없이 다가오는 주말, 그리고 돌아갈 집입니다. 종착지가 있다는 것, 기댈 곳이 있다는 것, 언제든 나를 환대해 줄 곳이 있다는 것은 삶을 든든하게 합니다. 여러분과 삼포 가는 길의 인물들이 갖는 본질적 거리, 같은 뜨내기여도 영달과 정씨가 지닌 근본적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는 정씨라 해서 삶이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엄동설한에 갈 데 없는 생활은 습관이 되었고, 십여 년이 지나서야 찾는 고향길이 고달픈 삶임을 방증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섬이라고, 비옥한 땅이 남아 돌아 가고,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며 한껏 자랑을 쏟아낸 고향이지만 십년 동안 그리워만 하고 갈 수 없었던 사람의 속내는 얼마나 쓰라릴까요? 당사자인 정씨가 사정을 자세히 풀어놓지 않으니 확인할 수가 없죠.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그리움의 무게인 어떤 것인지는 새로운 동행자 백화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겨우 스물 두 살임에도 삼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조로한 모습의 그녀는 술집으로 팔려 가는 바람에 인천, 대구, 포항, 진해까지 전국을 떠돌며 산전수전을 겪은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요,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죠. 그런데 마음뿐이지, 몇 년이 흘러요.”


우리두 의리가 있는 사람들


사실 저는 영달, 정씨 백화 이 세 사람이 처음에는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밥값을 떼어 먹고 달아나는 영달의 행실과 거리낌 없이 남의 아내와 놀아나는 부도덕함, 큰집(감옥)을 넘나들었다는 정씨의 내력, 술집 작부이며 빚 5만원을 떼먹고 줄행랑 치고 있는 백화의 모습. 그들은 말 그대로 치사한 건달과 비슷한 부류로 다가옵니다. 다만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이 아닌 사람 없다고 하죠. 곱게 본다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세심히 들여다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 사람의 사연을 밟아가며 세심히 들여다보고 나면, 이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고 진실한 세 명의 따스한 인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의 옷 한 가지도 못해 입으면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 한 백화에게서 희생과 헌신을, 자신이 가진 모든 걸 털어 삼림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사서 건네는 영달에게서 의리와 배려를, 영달과 백화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스한 조언을 건네는 정씨에게서 형·오빠에게서 느끼는 인간미를 경험하게 되죠. 그리고 이러한 세 사람이 함께하며 서로를 온기로 채웠을 때, 그들은 집에 도착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가더라도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그대로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 걸.” 대합실에서 만난 노인의 말은 애초부터 돌아갈 고향이 없었던 영달과 그토록 고향을 그리워하던 정씨를 동일한 처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말 하나로 정씨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죠. 아마 백화도 곧 그런 처지가 될 것이고요. 그녀가 고향을 향해 가고는 있지만 거대한 산업화의 흐름 아래 그녀의 고향만이 온전히 남아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영달-정씨-백화’ 세 사람의 모습은 마치 산업화로 인한 70년대 민중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처럼 비춰집니다. 고향을 잃은 지 오래인 영달, 그런 영달처럼 고향을 막 상실해 버린 정씨, 이제 곧 변해버린 고향을 마주해야 할 백화. 산업화로 인해 삶의 근원이 뿌리 뽑힌 그들의 삶은 앞으로도 뿌리 내릴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비록 소설의 끝은 눈발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 달려가지만, 저는 또 다른 삼포의 가능성을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정처라 할 삼포는 작품 속에서는 장소로 형상화되어 있지만, 사실 삼포는 어떤 측면에서는 사람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기억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오바마 대통령의 2009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은 제방이 무너졌을 때 낯선 사람을 받아주는 친절, 친구가 직장을 잃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의 근로 시간을 줄이는 근로자들의 이타심입니다.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연기로 가득찬 계단을 뚫고 가는 소방대원의 용기뿐만 아니라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의지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삼포는 가능성을 품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삼포의 삼(森)은 나무 목(木) 세 글자가 어우러진 글자죠. 삼포는 나무 세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룬 곳입니다. 정씨, 영달, 백화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고 길이 되어 준 것처럼요. 즉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또 다른 삼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하고픈 말을 노골적으로 꺼내자면, 제게는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바로 ‘삼포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작품 끝의 기차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불씨를 지필 수 있는 가능성은 아직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히 미래를 담당할 다음 세대인 여러분이 그 불씨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죠. 여러분이 우리 사회의 삼포가 될 그 날을 기대합니다.



참고문헌


황석영, 삼포 가는 길, 문학동네, 2020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 인물과 사상사, 2011

고석규, 고영진, 『한국사 속의 한국사 3 : 근·현대 150년』, 2016

조남현, 「1970년대 소설의 몇 갈래」, 김윤식⋅김우종 외,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

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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