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승진 Apr 17. 2024

『아버지의 해방일지』수업3

서평쓰기 수업 111~ 158쪽까지

질문1.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아버지의 행동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작은아버지의 인물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말’이지요. 일상을 지내다 보면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우리 가슴에 박히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정작 상처 준 이는 스스로 인지 조차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 말을 가슴으로 받아 낸 이는 왜 그 사람이 칼을 던졌는지, 칼의 깊이가 얼마큼인지, 상처가 어떠한지를 수시로 확인하며 고통을 반복해서 겪습니다. 심각할 경우 그 과정에서 아물어야 할 상처가 계속 벌어지고 패여 깊은 흉터로 남습니다. 또한 흉터를 감내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누군가에게 경험의 일부가 되지만, 누군가에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잔혹하게도 스스로가 내뱉은 말이 평생의 칼자국이 되어 버린 슬픈 아이입니다. 심지어 그 말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목숨조차 앗아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 고통에 눌려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이 반복되며 스스로 상처를 후벼 파던 아이는 왜 본인의 말이 스스로를 향한 칼이 되었는지 따져보았습니다. 단지 어린아이의 가벼운 한마디로 그칠 수 있었던 것이 왜 자신과 아버지와 온 동네를 파괴시킨 원흉이 되어 버린 것인지. 이제 자신의 말 자체보다는 그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존재, ‘문척면당위원장 형’의 존재를 상기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죽을 만큼 괴로웠던 아이는 이제 더 본질적인 원인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빨치산이 아니었더라면… 형이 마을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파국은 생겨나지 않았을 텐데. 동생의 가슴에 꽂힌 칼날이 이제 형을 향합니다.



 내 살을 후벼 파던 칼날이 빼내니 통증이 줄어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더는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상처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아버지를 루저로 보는 ‘나’도, 그를 형편없는 인물로 분석한 ‘우리’도 어쩌면 조롱하는 이에 속한 자가 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아버지는 어떤가요? 작은 아버지의 칼날 끝에 서 있으면서도 동생에게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았던 아버지. 작은 아버지의 원수로 살면서도 동생을 원수로 생각지 않았던 아버지. ‘니가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묵었냐?’라며 비난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맞받아치지 않는 이유를 단지 ‘미안해서’라는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동료들의 죽음 한 가운데 서서 울부짖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주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혼절한 작은 아버지의 고통을 가장 비슷한 수준으로 헤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만약 제가 작은 아버지로 살아왔다면, 이러한 형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정신줄을 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질문2. 사건을 시간순으로 배열하면 작은아버지의 어린 시절 성향 – 형에 대한 자부심 – 교실 사건 – 할아버지의 죽음 – 형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하지만 소설은 이 순서를 달리하여 형에 대한 원망부터 독자에게 보여준다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무엇이며 이것은 주제를 어떻게 강화하는가?     



인천에는 SSG 랜더스필드가 있습니다. 이 구장은 국내 야구장 최초로 관중 친화적 야구장으로 유명합니다. 삽겹살을 구워먹는 야구를 즐기는 장소, 아이들이 뛰놀며 온 가족이 함께 야구를 관람하는 그린존 등 야구 관람에 먹거리 놀거리를 과감히 적용했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관중들이 더 재밌게 즐기고 야구장을 더 많이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계속 읽어 나가게 만들고, 작품 의도에 흠뻑 빠져들도록 여러 장치를 배치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플롯입니다. 인물, 사건, 배경, 시점, 장면 등 소설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결정하여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키고 주제에 다다르게 합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플롯 중 하나가 ’작은 아버지‘의 사연입니다. 형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전면에 배치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반대되는 형에 대한 자부심이 배치됩니다. 그리고 숨겨진 트라우마, ’아버지의 죽음‘이 나타납니다. 형편없는 인간 같았던 작은 아버지가 이제는 ’오죽허먼 인간형‘으로 다가옵니다. 돌이켜보니 영달과 백화도 오죽허먼 인간형들이겠군요.     


이러한 플롯은 독자들이 작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나아가 사연을 품은 삶에 대해 생각케 하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러 사연들의 집합입니다. 완벽히 포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삶마다 각각의 사연이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시선이 더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읽고 나면 빨치산도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나누었죠. 이 책을 읽은 후 우리가 수많은 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버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질문3. 135p “노인네가 지팡이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는 바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노인의 손에 달려 나온 것은 구깃구깃한 지폐 몇장이었다천원권과 오천원권이 뒤섞인 지폐를 노인은 기어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노인은 왜 돈을 주고 갔을까?


지금의 ’장승진‘으로서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인데요. 눈 내리던 어느 겨울에 노숙자 한 사람이 교회를 찾아와서는 밥값을 좀 달라 했더랍니다. 목사님은 일단 이리로 좀 앉으세요. 따듯한 치 한잔 드시며 몸부터 녹이시라고 했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노숙자 분이 자리를 털고 교회를 나가려 하자 목사님이 서둘러 5천원 지폐를 꺼내 드렸습니다. 그런데 노숙자 분께서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이거 내가 실수했나보다. 액수가 너무 적어 마음이 상하셨나보다. 당황한 목사님이 제가 현금이 없어서 그러니 잠깐만 기다리시라. 금방 오겠다 했더니, 노숙자 분이 이리 답하셨답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돈이 제일 좋을 줄 알았는데 더 따스한 대접을 받은 거 같아서 그냥 갈란다. 라고 했다 합니다. 이 이야기를 스무 살쯤에 들었는데 그 후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도 않고 물리적인 효력도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을 대하는 진심의 가치를 배웠다고나 할까요.     



저는 돈을 건네고 돌아서는 노인에게서도 아버지를 향한 진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황사장은 그가 진상을 부리자 초상만 나먼 꽁술 잡수러 오는 양반이니 담아 두지 말라 합니다. 실제로 화환을 지팡이로 후려치던 노인은 몸에 술이 들어가자 태도가 돌변하죠. 말끔한 태도로 ‘나의 이름을 부르고 사과를 건네기까지 합니다. 나아가 본인의 형님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에 덕에 시신도 찾았다는 고마움을 표하죠. 다만, 꽁술을 얻어 먹었으니 이제 순순히 돌아가면 될 텐데 이전에 보기 힘든 행동을 합니다.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천원권 오천원권이 뒤섞인 지폐를 건넵니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는 평소와 다른 목적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평소에 꽁술을 위해 오고 갔던 노인네일지 모르나, 오늘만큼은 술 때문에 온 것이 아닌 셈이죠. 평소와 다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나‘와 나눈 이야기들을 보면 ’아버지‘ 가는 마지막 길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술기운 없이는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노인이었지만, 애써 내민 지폐가 그의 진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누군가의 진심은 이토록 사소한 차이에서 새어 나오는 법입니다.



질문4. 141p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아버지식의 위로가 대체로 잘 먹힌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류시화의 시선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에는 이슬람 철학자이자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의 명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은 ‘봄의 정원으로 오라’입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기가 막힌 시입니다. 하지만 저의 뇌리에 한결 더 각인되어 있는 루미의 시는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옳은 일, 그른 일 저 너머에 들판이 있네.

나는 당신을 거기서 만나리.     


꽃과 술과 촛불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존귀한 당신, 그런 당신조차도 옳고 그름이란 기준 아래 비교 당하고 판단 받는다면 초라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미는 기존의 잣대는 내려놓고 저 너머의 들판에서 존재 대 존재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존재 자체를 존중받는 만남은 평안으로 충만한 관계가 됩니다.     


아버지식 위로가 대체로 효과가 있었던 것도 당사자들과 들판 위에서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식 위로의 핵심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렇지’는 ‘아무러하다’의 준말로 어떤 것에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 즉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을 들이밀지 않고 상대를 온전히 대함을 뜻합니다. 담배를 피며 방황하는 아이를 대할 때 어른의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한 갑자의 나이 차도 관여치 않은 채 담배 친구로 머물러 주는 것, 오른쪽 검지가 화상으로 뭉그러진 친구에게 어설픈 동정을 건네기보다는 그냥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 주저함 없이 말을 건네는 것, 결국 아버지식의 위로가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상대를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들판의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요.


벌써 '아버지의 해방일지' 읽기가 후반으로 달려합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사람을 마주하는 법과 사람을 대면하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마지막 쪽을 덮게 될 때면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이 더 넓게 해방되어 있기를 꿈꿔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두운 들판 끝에도 삼포는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