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넘칠 만큼 넣어야 비로소 차는
자신감을 갖는 것, 그리고 모성. 이 두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의 노력만큼 그것이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마 다른 세상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에서 유학생 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이다. 수업시간에 앉아 있다 보면, 참 미국애들 똑똑하구나, 내가 어쩌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 들어왔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합격은 누군가의 실수일 거라는 확신마저 든다. 나도 뭐라도 토론에 끼어들고 싶을 때면 내가 하는 생각이 너무 수준이 낮을까 봐, 그리고 혹여 수준이 있더라도 내가 쓸 줄 아는 표현의 한계 때문에 너무 유치하게 들릴까 봐 말을 거두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백인 젊은 남성 거지를 보았다. “왜 당신은 거지가 되었나요. 내가 당신처럼 백인 남성에 영어를 잘한다면 아마 지금 대선 후보에 나갔을 겁니다.”라고 자동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잘하면, 인종적 한계가 없다면, 혹시 남자라면 뭐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매우 원초적인 원망이 올라오기도 했다. 모든 지표가 내가 잘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 지표들에 납득이 되지 않고 수업시간에 들어가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견뎌야만 했다.
2년의 석사과정. 그리고 박사 과정. 내가 다닌 학교들은 보통 한 수업에 교과서가 최소 2-3권이다. 그런 수업을 보통 4과목을 듣는다. 한 학기 책값만 100만 원이 넘는다. 읽어야 하는 양이 무지막지하다. 영어 읽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 유학 초기에는 아무리 밤을 새워서 읽어도 줄어들지 않는 양에 절망하여 울면서 책을 읽기도 하였다. 모든 수업은 리딩을 다 했다는 전제 하에 운영된다.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반복하는 일은 없다. 수업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데, 읽어오라는 책이라도 다 읽어가야 그나마 조금 알아들을 테니, 수업 준비는 언제나 100%였다. 미국의 겨울 집은 매우 건조한데, 자기 전에 닦은 칫솔이 아직 축축할 때, 일어나서 다시 이를 닦았다. 처음 1년은 정말 3-4시간 이상 잔 날이 없다. 어느 날 아침 대만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를 가는데, 아직 하늘에 떠있는 달이 너무나 컸다. 아직도 길 끝에 걸려있던 그 커다란 빨간 달이 기억이 난다. “달이 되게 크다. 추석인가?”라고 대화를 나눴다. 그날이 진짜 추석이었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 개념도 없고, 아시아 학생들은 이 추석을 기념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는 왔지만 우리의 일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내 전공은 학교에서 다른 전공 사람들이 알아줄 만큼 공부, 실습 양 등이 과도했다. 나는 게다가 우리 과에서 유일하게 부전공까지 했다. 졸업할 때는 거의 죽었다 살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박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에 참여 인원은 더 적다. 내가 들은 수업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수업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토론식이다. 미리 책을 읽고 와서 수업 내내 토론하고, 질문하고, 의견을 말한다. 어느 수업시간에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들 중 나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어.” 학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쭉 듣고, 학생들 면면을 들여다보니 그랬다. 그 많은 책과 자료를 처음부터 끝까지 매번 다 읽고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어떤 미국 학생은 “나는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의견은 있다”라고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학생들도 다 모를 것이다.’ ‘내가 이 수업 내용에 한해서는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정말 마음이 가벼워졌다. 교수님에게 질문도 하고, 의견을 말하는 것도 쉬워졌다. 말을 하기 전에 내 마음속에는 “내가 다 읽어보고 다 미리 연구도 해봤는데.”라는 말이 올라왔다. 과제가 어려우면 과제가 어떤 부분에서 너무 어렵다고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제야 다른 학생들은 시작도 못했다고 앓는 소리를 해댔다. 박사 2학기 때, 가장 높은 레벨의 연구 관련 수업을 들었다. 나를 매우 잘 본 지도 교수님의 추천으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요구하는 것도 많고, 읽어야 하는 것도 너무 많고, 과제는 7개고, 최종 과제도 미니 박사 논문 수준이었다. 나는 그 수업을 듣는 동안 매일 꿈을 꾸었다. 그 수업을 중도 포기하는 꿈 말이다. 동시 수강하는 수업의 교수님들께 그 수업을 듣는다고 하면 하루 이틀 정도는 숙제 내는 날을 유예해 주실 정도였다. 8명이 들었다. 마지막 수업 날, 나는 문고리 잡고 기절하는 모양으로 7번째 과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알았다. 그 수업에서 학기가 끝날 때, 과제를 모두 낸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다른 학생들은 보통 과제 번호 3번, 4번 작업 중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박사 수료 상태에 논문을 쓰는 단계기 때문에 나보다 더 많은 지식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수업에 이미 박사 학위가 있는 학생도 2명이나 있었다. 마지막 날 숙제를 많이 못한 하버드 출신의 학생은 뭐 때문인지 화를 잔뜩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어려운 수업이었다. 그러니 그 수업을 기간 내에 마친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것은 엄청난 성취였다. 게다가 내가 낸 과제들은 다음에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 샘플로 사용이 되었다.
나는 자신감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 이후로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심리적으로 매우 쉬워졌다. 나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려운 것은 진짜 어려운 것이고, 나처럼 열심히 듣고 따라가는 사람이 모르는 것은 교수님이나 학교에서 설명을 빠뜨린 것이다. 나중에는 나처럼 똑똑한 사람이 못 알아듣는 것은 진짜 어려운 것이니 천재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냥 패스해도 된다라는 생각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상담심리를 공부할 때는 교수님이나 내 주변 모든 사람이 이런 마음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말을 해주는 것은 거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그때도 그들의 인정하는 말이 나를 달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힘은 나의 성취의 경험, 그리고 그것에 넣은 나의 노력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이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신여성 나혜석은 자식을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초기에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식을 키우면서 자신의 아이를 위해 치르는 고통과 희생이 모두 사랑이 된다고 어머니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글로 남겼다. 모성은 아이와 함께 어미에게 생기는 자연스러운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아이와의 성장을 함께 만들어가면서 만들어지는 감정이라는 뜻이다. 많이 희생하면 사랑은 더욱 커진다. 먹이고 재우고 하는 일반적인 노동과 아이가 커가는 동안 생기는 수많은 노심초사와 나의 불안, 그리고 부적절한 감정들을 다스리면서 아이에게 최선의 모습을 다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모성은 커진다.
나는 못 말리는 딸 사랑꾼이다. 아주 유명하다. 아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내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 스무 살이 된 지금도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둘이서 뭔가 진지한 것을 하려고 하면, 둘이 너무 웃다가 결국 때려치우게 된다. 하나뿐이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참는 것이었다. 정성스러운 음식, 예쁜 옷, 좋은 교육 등은 부수적인 것이다. 아이를 위한 인내와 기다림이 부모가 되는 가장 핵심이라 생각이 된다. 화를 내고 싶고, 아이를 원망하고 싶고, 심지어는 큰 소리를 치며 때리고 싶은 마음도 숱하게 올라온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박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두 가지 보통이 아닌 일을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견디는 것은 보통 버거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는 대신 엄마와 남편에게 전화로 하소연을 해댔다. 아이에게 화를 막 내고 싶을 만큼 너무 힘든 날은 차라리 아이 앞에서 큰 소리로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해맑게 나를 달래고 위로하는 딸을 보고 더 큰 소리를 내며 아이처럼 울었다. 미운 일곱 살 시절 즈음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같이 악몽을 꾼 적이 있다. 내가 아이의 뺨을 아이가 날아갈 정도로 세게 때린 것이다. 때리고 나서 아주 시원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 시원한 마음에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며 악몽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했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를 때리는 꿈이야 꿀 수 있지만, 시원한 마음이 든 것에 너무나도 큰 감정적 동요를 경험했다.
사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폭력을 쓰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감정적 도전이다. 아이가 크면서는 밥을 잘 먹지 않는 것, 공부를 안 하는 것,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아서 부모가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 수많은 도전이 계속된다. 하지만, 매 순간 그것을 마음으로 다스리고, 아이 편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기다리면 좋아진다는 희망을 가지고 달래고 설득하고, 그리고 아이가 딱해서 참고 참아가는 것은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코로나 사태로 입시 준비의 한 복판에 온라인 수업을 진행할 때, 늦게 일어나고 공부 안 하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거의 극기 훈련 수준이었다. 나는 결국 응급실에 두 번이나 들어갔다. 모두 큰 병명은 없다. 발작 같은 것들이었고, 몸이 조금씩 망가져 있었다. 나는 안다. 매일매일 참아야 했던 그 마음이 내게는 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꿀밤 한 대 안 때리고 애지중지 키웠다. 물론 훈육을 안 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나가서 미움받는 아이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훈육은 정확하게 했다. 부모와 관계가 좋은 아이들은 훈육이 별로 어렵지가 않다. 보통 가르치면 잘 알아듣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자기가 노력을 하고 경험을 해야 그것이 자기 것이 되고, 자기가 사랑을 해야 그것에 대한 애착이 커지는 듯하다. 오래전 본 한국 코미디 영화 중에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법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방법은 독을 물에 넣는 방법뿐이었다. 노력도, 사랑도 넣어야 할 양이 이미 넘쳐서 그 독을 담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인생의 무언가를 드디어 채울 수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