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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17. 2020

집사 실격

태리야 제발 놀아줘


집사 실격


좋은 집사는 어떤 사람일까? 고양이가 바닥에 똥스키를 타고 벽지를 뜯어도 너그러운 사람? 곁을 주지 않아도 기다려 주는 사람? 풍부한 환경을 만들어 줄 경제력이 있는 사람?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고양이에게 스케줄을 맞추는 성실한 사람? ... 전부 다 아닐까? 이 잣대로 보면 나는 집사 실격이었다. 떡잎부터 그랬다.


우선 나는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최근 동생들이랑 도자기 1일 수업을 들었다. 우리가 자매라고 밝히니 선생님이 "좋겠다. 언니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라고 물으며 동생들에게 동조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순간 동생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고 적절한 대답 시간이 지나면서 국지적 지진이 전방위로 퍼졌다. 다 같이 어색하게 웃고 상황 종료. 그도 그럴 것이 동생들하고 장난감이나 옷, 화장품 때문에 싸우면서 유리창도 깨고 머리카락도 뽑고.... 오죽하면 동생이 생일 선물로 분노조절에 관한 책을 줬다.


인내심도 모자라다. 나는 불확실한 미래의 마시멜로보단 눈앞의 마시멜로를 택하는 삶을 살았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바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역류성 식도염과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사는데도 매운 음식이랑 커피를 못 끊는다. 특히 커피. 자려고 침대에 누워 내일부터 커피 끊자 다짐하지만 아침이 오면 졸음을 떨친다는 핑계로 커피부터 내린다.


가장 심각한 결격사유는 경제력이었다. 사범대 학사를 장장 9년 만에 졸업했다. 흥청망청 놀다가 그런 거라 취업할 능력이 안돼 궁여지책으로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몸이 견디지 못해 직장생활은 1년 반밖에 못 했다.


게다가 아주 성실하게 논다. 늘 지금! 롸잇나우! 마시멜로를 추구하다 보니 학업 등 해야 될 일은 늘 뒷전이라 삶이 주객전도였다. 흐리멍덩했던 눈은 하교 종이 울리면 샛별보다 반짝였고, 친구랑 놀고 쇼핑하고 채팅하고 파도 타다가 메신저 접속자가 0이 되면 잤다. 그러니 아침에 눈이 안 떠져 지각하기 일쑤였다. 가뜩이나 약골이라 결석도 잦았는데 지각까지 더해져 출결 문제로 고등학교를 졸업 못 할 뻔했다. 놀 시간이 부족해 잠을 줄였던 나는 당연히 공부는 최소한만 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감사인사를 받았다. 성적 '깔아줘서' 고맙다는 인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취하는 대학생이 되면서 나의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은 극성수기를 맞았다. 락밴드 동아리에 가입해 시드 비셔스, 재니스 조플린 등을 알아가며 락커의 삶을 답습했다. 그때 나는 미쳤었다. 학사경고 세 번을 받고도  "이게 락앤롤이지!"라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고 낄낄거리며 새벽의 홍대를 누볐다. 나와 모범 집사 사이의 거리란 우주 심연으로 날아간 보이저호와 지구만큼 멀었다.


떡잎부터 집사 실격. 그게 바로 나였다.





고양이가 사람 만든다


그랬던 내가 고양이라니. 31년 내 인생은 고양이를 키우면서 처음으로 변했다. 요즘 나는 저녁 8시부터 웬만하면 폰을 안 보고, 9시쯤 숙면을 돕는 차를 마신 뒤 10시엔 침대에 눕는다. 아침엔 늘 좀비 모드였던 내가 오전 5~6시에 일어나 고양이들 조식을 챙기고 명상을 한 뒤 화분에 물을 준다. 아침이 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새나라의 어른이로 거듭났다. 어린이 때도 안 해 본 바른생활을 이제야 한다.


언젠가 여행길에서 만난 분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삶이 아이를 낳으면 완전히 달라진다고, 삶에 겸손해진다고. 아직 아이는 없지만 그때 말씀하셨던 게 이런 걸까?


평생 게을렀던 내가 하루아침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 건 내 반려묘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제는 일상이 조금만 어그러져도 불안하다. 규칙적인 일상은 최소한의 양심이다.


인생 첫 고양이


규칙적인 생활이 간절했던 다른 이유는 내 첫 고양이가 태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정신없이 직장생활에 적응할 때쯤 친구가 키우던 고양이를 입양했다. 그 고양이는 우리 집에 오자마자 중성화 수술을 받고 허피스에 곰팡이 피부염까지 나서 첫인사가 썩 좋지 않았지만 나름 잘 지냈다.


문제는 나였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 힘겨워지고 전쟁 같은 신혼생활이 겹치면서 나는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난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살던 어미묘와 가족을 그리워하듯 현관을 보며 울었다. 새로운 간식, 장난감, 스크래처로 달래 봤지만 소용없었다.


친구와 상의 끝에 친구 집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바로 동료 고양이를 데려오기로 한 것. 네이버의 한 카페에서 첫째와 비슷하게 다묘가정에서 어미묘와 자란 태리를 입양했다. 기대와 달리 둘은 데면데면. 태리를 데려온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고양이가 외로워, 심심해 보인다고 둘째를 입양한 내 결심은 너무 게으르고 멍청했다. 나와 첫째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새로운 고양이로 해결하려 했으니까.


당연히 우리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고양이가 한 마리 늘어 더 바빠진 만큼 첫째에게 소홀해졌다. 게다가 남편과의 전쟁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첫째는 전선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어떻게든 이식 행동을 멈추려고 더 놀아주고 최대한 같이 시간을 보냈는데도 이미 늦었던 것 같다. 아이는 매일 전선을 씹고 먹었다. 언제라도 큰일이 날 수 있는 위험한 시간이 계속됐다.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해서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는지 모르겠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결국 친구를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첫째를 친구에게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내 첫 고양이를 파양했다.


다행히 아이는 잘 지낸다. 우리 집에서 8개월 정도 사는 동안 입이 짧아 몸무게가 안 늘어 걱정했는데, 친구네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살도 찌고 어미묘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재입양을 포기했다.


인생 첫 고양이를 그렇게 보내고 오늘도 후회한다. 더 노력해야 했다. 열심히 놀아주고 내 노력만으로 부족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행복하게 해줬어야 했다. 첫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배짱으로 태리까지 입양한 걸까. 태리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첫째를 파양하고 얼마 안 가 건강 문제로 직장을 그만뒀고 반년 동안 폐인 생활을 했다. 대인관계가 힘겨워 관계를 모조리 끊고 종일 텔레비전 앞에 누워 있었다. 남편과 갈등도 날로 격해져 견딜 수 없을 때면 돌연 여행을 가고 별거도 했다.


언젠가 이 모든 게 다 끝난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는 시기였다. 일도 결혼도 친구도...삶이 버거웠다. 게다가 고양이들에게도 상처를 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어미묘 껌딱지로 잘 살던 첫째 아이를 입양했다가 파양한 나를. 비겁하게 나만 사라지면 다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내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사라졌다.


현재도 미래도 없는 매일을 흘러 보내며 죽고 싶을 때마다 정신 차리게 해 준 건 태리였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체념과 우울의 터널 저 끝에서 태리는 이쪽으로 오라며, 나와 같이 살자고 야옹야옹 울면서 날 지켜봐 주었다. 마음이 눈물로 증발되어 몸이 텅 빈 밤이면 태리는 자신의 작은 몸의 온기를 내게 비벼 주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 아이만은 파양하면 안 돼. 내가 기필코 책임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내 의지로 데려온 두 번째 아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고양이를 파양한 적 있기에 더 태리한테 매달렸다. 우울해서 온종일 무기력해도 태리 놀이랑 밥을 챙기며 버텼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게 내 미래다 싶은 건 20대가 저물어갈 때나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현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20대에는 이번 삶은 망했다며 체념했다면, 이제는 태리를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어서 눈을 부릅뜬다.


애초부터 집사 실격이었던 나. 한참 모자란 내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태리 묘생에 전념했다. 태리라도 행복해야 내가 구제될 것 같았다. 그리고 태리가 기뻐할 때마다 희망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나는 태리의 오늘의 행복을 챙기고 내일의 행복을 준비한다.


늦었지만, 그런 노력으로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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