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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18. 2020

메이저리그 스타와 조기 야구회 신입의 데이트

태리야 제발 놀아줘

사냥놀이를 데이트하듯


오늘도 태리는 장난감에 관심이 없다.


장난감에 질렸나 싶어 벌써 다섯 번 장난감을 교체했지만! 움직임이 별로인가 싶어 20분째 내 모든 스킬을 대방출했지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리는 보란 듯이 카펫에 누웠다.


놀이 실패다. 나는 전의를 상실한 채 소파에 파묻혔다.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사냥놀이에 대해 생각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내가 뭘 잘못하는 걸까. 사냥놀이란 대체 뭘까. 태리랑 다른 때는 소통이 잘 되는데, 왜 유독 사냥놀이만 어려운 걸까. 이러니까 영문도 모르게 삐진 연인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네. 연인이라... 사냥놀이는 데이트랑 비슷할지도.


비일상적(일부러 시간을 내야 됨)이면서도 일상적(정기적으로 만나야 관계 지속)이고, 최소한 한 명은 사전 준비를 하는데 결과(데이트의 성패?)는 알 수 없으니까.


사냥놀이를 제외하고 태리가 즐길 것이라고는 푸드퍼즐이나 창밖 구경이 전부다. 그마저도 집사가 성실하고(푸드퍼즐) 환경이 허락해야(창밖 볼거리) 가능하다. 푸드퍼즐은 하루에 두 번 주지만 창밖에 구경거리가 없어 유난히 긴긴 하루를 태리는 사냥놀이만 기다릴지도 모른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데이트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게다가 사냥놀이는 강아지의 산책처럼 필요 불가결한 일과가 아니던가!)


데이트를 생각해 보자. 데이트 당일 뭘 할지, 뭘 볼지 열심히 준비하고, 만나는 동안에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적극적으로 리드할수록 즐거운 데이트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반대로 일이 바빠서 준비를 못 하고, 만나는 내내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면 실패할 공산이 크다. 사냥놀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물론 우리의 경우 노력하는 쪽은 당연히 나다.


소파와 한 몸이 돼 공상하다가 문득 옆을 보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태리가 눈에 가득 찼다. 진짜 어떻게 저런 귀여운 존재가 세상에, 아니, 우리 집에 있지?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야. 만약 사냥놀이가 데이트라 하더라도 나랑 태리는 급이 천양지차라 현실성이 없어.


우리 둘의 매력 차이를 야구에 비유하자면 태리는 메이저리그 홈런타자, 나는 야구 1도 못 하는 조기 야구회 신입부원 정도겠지. 누가 봐도 그럴 거야. 이런 나인데 같이 살아 주다니! 게다가 난 집사 실격인데!

보기만 해도 행복 호르몬이 솟구쳐 쇼크사할 것처럼 귀여운 태리. 심지어 외모만 귀여운 게 아니다. 태리는 밥만 줘도 애교를 부리고 싫어하는 행동(목욕, 발톱 깎기 등)을 해도 얌전한 데다 내가 바쁠 때는 옆자리나 무릎에 누워서 기다려 주기까지 한다. 내 분에 넘치는 아이인 게 자명하다. 이런 나랑 같이 살아 주다니 태리한테 절이라도 해야 될 듯. 이쯤 되면 답이 나온다. 우리 데이트의 성패를 가르는 건 나의 노력뿐이다. 고작 20분 장난감 흔들다가 지쳐서 뻗다니. 이런 게으른 몸과 마음으로는 태리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이제부터 노력 천재가 될 테다.


데이트의 기본


남편은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집 안이건 밖이건 자리에 앉아 식사 준비를 마치면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한다. 항상 주의를 주지만 듣는 건 그 순간뿐, 금세 잊고 손가락에 모터 달아놓은 듯 게임에 열중한다. 심지어 식사 중에는 기사나 커뮤니티를 훑느라 폰에서 눈을 못 뗀다.


어느 늦은 오후, 단골집에서 브런치를 먹는데 같은 풍경이 연출됐다. 나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 눈빛으로만 욕하다가 문득 태리 생각이 났다.


돌이켜 보니 나도 비슷한 버릇이 있었다. 그때 난 드라마나 웃긴 동영상을 몇 시간씩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태리랑 놀아줄 때도 멈추지 않았다. 티브이 보다가 태리 보다가... 이런 식으로 노는 둥 마는 둥.

집사 완전 실격.


태리가 사람이었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고양이니까 아무리 마음이 상해도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놀이 도중에 내가 티브이나 폰을 응시하면 태리는 몇 번 울다가 포기하고 기다리다가 잠들곤 했다.

반성했다. 그때 태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집사가 또 바쁘니 기다려야지, 했을까, 아니면 집사가 저럴 때마다 너무 싫다, 였을까.


남편이나 나나 다를 게 없었다. 당장 달라져야 했다. 스트레스 핑계는 그만. 태리가 일방적으로 참고 이해해줬으니 이제부터라도 속죄해야 한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메이저리그 스타한테 동네 야구 동호인이 이렇게 오만했던 걸까.


태리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데려온 건 나다.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태리한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 후로 나는 태리랑 놀아줄 때 스마트폰은 방구석에 놓고 텔레비전은 절대 켜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늦게 깨달은 사냥놀이의 기본자세다.


아울러 놀이를 방해할 만한 소음을 최대한 차단한다. 우리 집은 베란다 밖에 놀이터가 있고 나무가 많아서 새,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이나 아이들 노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놀다가 그런 소리가 들리면 태리는 지체 없이 베란다로 뛰어간다. 그래서 베란다 창문은 웬만하면 닫는다.


남편 소음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통화 소리, 기계식 키보드를 치는 현란한 소리, 층간소음이 걱정될 정도로 열심히 걷는 소리 등 태리를 산만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아서 태리가 놀 동안 남편을 방에 격리한다.


이제 태리가 노는 동안 우리 집에서 들리는 소리는 딱 세 가지다. 장난감이 움직이는 소리, 태리가 뛰는 소리, 그리고 태리가 간식을 핥아먹는 소리.


사냥놀이는 온전히 태리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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