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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18. 2020

게으름뱅이 뚱냥이 공략전

태리야 제발 놀아줘

태리를 소개합니다


이마에 M자 무늬가 선명한 갈색 태비 고양이 태리. 내게 처음 온 날, 생후 8개월밖에 안 된 태리는 낯선 환경이 무서워 밤새 고타츠 속에 몸을 숨겼다. 허기에 모습을 드러낸 태리는 수염이 아침 아빠 수염처럼 삐쭉삐쭉했다(전에 살던 집에서 어미묘가 터프하게 그루밍을 해줘서 수염이 자랄 새 없이 뽑혔다고).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 내게 있는지 몰랐던 모성애(노예근성)가 꿈틀댔다.


짧던 수염이 무럭무럭 자라난 태리는 기다란 수염만큼 놀이욕, 특히 식욕이 왕성했다. 입양 보내신 집사님이 입양 계약서에 경고할 정도였다.


"태리가 식탐이 많아요. 가끔 사람 음식도 탐내니까 조심하세요."


실제로 남편이 꼬불쳐 둔 건조 오징어 간식을 어떻게 찾았는지 몇 번 훔쳐 먹다가 걸렸다. 놀 때는 프로펠러가 달린 것처럼 날아다녔다. 잘 때는 내 다리 사이나 옆구리에 몸을 기대고 잤다. 짱구의 고양이 버전이 태리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태리는 깨발랄하고 애교 넘치는 천방지축 고양이였다.


그랬던 태리가 어느 밤, 유난히 스킨십을 진하게 하고 구슬프게 목청껏 울었다. 발정기였다.



게으름뱅이 뚱냥이 공략전


중성화 수술을 받고 태리는 달라졌다. 장난감에 시큰둥, 사료도 금세 질려서 간식을 뿌리거나 주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식사를 거부했다. 바닥에 닿을세라 점점 늘어지는 뱃살은 기존 생활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경고였다. 중성화 수술을 집도하신 수의사 선생님이 예고한 일이었다.


"아이 체중 관리 잘하셔야겠어요. 이미 지방이 좀 있네요. 체구가 작아서 3.5킬로그램 이상으로 찌면 안 됩니다."


하지만 태리는 순식간에 4킬로를 돌파했고 지금은 4.5킬로를 겨우 유지 중이다.


솔직히 말하면 결혼하고 찐 내 뱃살이 더 시급해 보이지만 태리가 알아서 살을 뺄 리 없으니 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전문가의 저서나 육묘 콘텐츠를 보니 방법은 식사 전에 놀고 보상으로 간식 대신 식사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태리의 무병장수를 위한 놀이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게으름뱅이 뚱냥이 공략전!


근데 웬걸. 태리는 불어난 살만큼 놀이욕이 뚝 떨어졌다. 분명히 엊그저께까지만 해도 사료 알이 그릇에 떨어지는 소리만 나면 내 눈앞에 뿅 나타나서 초능력 냥이라고 믿을 정도였는데. 뭐든 움직이는 것만 보면 그게 내 머리카락이라도 물려고 뛰어들었는데. 짜 먹는 간식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포장지까지 씹어 먹었는데.... 이제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드러누워 매서운 눈빛으로 내게 욕했다. '@#%같은 집사 새끼... 감히 날 병원에 데려가서 수모를 당하게 했겠다...'라고 눈으로 쏘아댔다. 똥꼬발랄했던 아이는 어디 간 거죠? 돌변한 태리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의욕 면에서 태리와 나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고난 약골이라 지병도 많은데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생활까지 하니 스트레스가 허용치를 초과해 퇴근하면 지쳐서 장난감을 두어 번 겨우 흔들까 말까였다. 한마디로, 나는 매일 생리 첫날인 듯한 그로기 상태였다.


그래도 가만히 태리가 욕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비겁한 전략을 택했다. 부족한 시간과 체력을 메꿀 장난감을 미친 듯이 사줬다. 사람들이 신상 좋아하듯 고양이도 마찬가지일 거라 착각하고 깃털, 플라스틱, 종이, 뱀 장난감, 각종 퍼즐피더에 자동 장난감까지...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샀다.


돈으로 사랑 못 산다더니,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새 장난감에 반짝이던 눈은 1분도 안돼 차갑게 식었다. 태리는 바닥에 태굴태굴하면서 놀이는 됐으니 간식이나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때 태리는 마치 남편 하나 믿고 연고 없는 곳에 신혼살림을 차린 새댁 같았다. 일하느라 바빠 사이가 서먹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남편의 선물 공세가 무색하게 마음이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새댁.

내가 건강 문제로 퇴사하는 바람에 선물 공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건강 회복을 목표로 쉬기로 했는데, 나는 원체 집순이였던 터라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시간을 태리랑 보내게 됐다. 기약 없는 백수생활이 시작되며 태리 사냥놀이가 할 일 0순위로 갱신됐고. 하지만 이미 토라져버린 지 오래인 새댁처럼 태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로소득 없는 백수인 내가 매번 새 장난감을 바칠 수도 없었고.


이때부터였다.


내가 태리의 마음을 끈질기게 살피기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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