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소설 답기도 했던 식사였던 것 같아요
2023년 6월 6일 제주 여행 1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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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 따라 제주 넘은 이야기 ③ (brunch.co.kr)
혼여행객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식사 장소다. 관광지인 제주 특성상, 2인 위주의 식탁 구성이 주를 이룬다. 나 역시도 혼자 여행 중이기 때문에, 메뉴 위주의 선정보단 ‘식당의 형태’를 우선순위로 고려했다. 즉 ‘혼밥’이 충분히 가능한지, 조금 욕심을 부린다면 식당 주인을 비롯해 혼자 온 다른 손님과 ‘아이 컨택트’ 정도는 가능한지 알아봤다. (사실 후자의 경우 사람에 따라 전혀 필요 없을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기회라도 없으면 여행 내내 단 한마디도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발길 따라 ‘소길역’에 다다랐다. 일본 관서식 스키야키를 메인 메뉴로 판매하는 이곳은 식당 전체가 바(bar) 형태로 되어 있다. 사람이 북적인다 해도 시선 처리가 부담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딸랑-. 가게 문소리가 나자마자, 안에서 어느 여자가 “어서 오셔요!” 격하게 환영했다. 입구에서 코너를 돌아야 식당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이미 나 같은 혼여행객을 많이 상대해 본 느낌이 들었다. 코너를 돌자, 이윽고 주인 얼굴이 보였고 그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게 됐다. 뭔가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 들어본 목소리와 큰 성량이 날 반겼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스키야키?” 라고 물었다. 나는 “아, 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에는 3명의 손님이 바 중간쯤에 연달아 앉아있었다. 나는 이들과 두 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고, 자연스레 이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단골이었다. 주인은 그 손님 중 한 명을 ‘회장님’이라고 불렀고, 회장님 옆에는 친구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남은 스키야키 우동을 후루룩 흡입하고 있었다.
그제야 가게 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미식가나 평론가처럼 말을 명확하고 깔끔하게 전할 순 없으나, 굳이 열심히 표현해 보자면 마치 한국식 호프집과 일본 이자카야의 분위기가 오묘하게 섞인 곳이었다. 평소 현지 냄새 물씬 나는 일본 TV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편인데, (<고독한 미식가>, <선술집 바가지> 등의 작품은 N회차 시청 중이다), 딱 그런 프로그램에서 등장할 만한 이자카야 느낌이 났다. 바에 앉으면 정면으로는 각종 술(니혼슈, 화요, 맥주 등)들이 보인다. 하지만 가게 간판이나 메뉴판 디자인, 주인분의 착장 등을 보면 동네 호프집 같은 느낌도 적잖게 풍긴다.
이곳 소길역은 가수 이효리가 살았던 곳으로 이름을 탄 소길리에 잠시 들렀다가는 역(驛)의 의미를 더한 듯 보였다. 주인은 내 스키야키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에 들어갔지만, 입과 귀는 손님을 향해 있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먼저 들어와 있던 손님과 나누는 만담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단체 손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그가 “계산이요” 하자, 주인은 카운터로 나와선 “회장님 잔돈 없으니까 그냥 카드로 주쇼”라며 받아쳤다. 회장님이란 그가 예상외로 카드가 없다고 나오자, 주인은 “그럼 다 해서 124,000원이니까 12만 원만 줘”라고 털털하게 말했다. 하지만 회장님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에이 됐어, 13만 원으로 긁으셔”라며 툴툴댔고, 결국 이 둘은 13만 원으로 원만한 합의에 이르렀다. 주인은 조만간 다시 오면 카레를 대접하겠다고 안녕을 고했다. 잠깐의 모습만 봤는데도, 식당의 콘셉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졸지에 식당엔 나와 주인만 남아 있게 됐다. 북적일 바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이 어디서 왔냐 묻는 순간, 문이 다시 딸랑거렸다. 코너에서 웬 중년 남자가 혼자 걸어 들어왔다. 그가 수줍게 “혼자되죠?”라고 묻자 주인은 ‘이때다!’ 하는 느낌으로 중년 남자의 자리를 내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이유는 본인이 음식 준비하고 자리에 놓을 때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바로 옆자리라 솔직히 당황은 했지만, 혼자 온 사람들끼리 대화 좀 나누라는 듯한 주인의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주인은 준비하던 스키야키 양을 늘려, 중년 남자 몫까지 한 번에 차려 내왔다. 1인 인덕션에 스키야키를 올려놓자 머지않아 보글보글 스키야키가 끓었다. 주인은 ‘이때다’에 이어 ‘옳다구나’하며 스키야키의 유래와 깨알 본인 자랑을 시전 했다. 확실히 음식에 대해 알고 들으면 이해가 조금 더 되는 느낌은 있었다. 그의 짧은 연설이 끝나자,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때 비로소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둥글둥글 내 둘째 이모부 같은 푸근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첫 질문 ‘국룰’이라고 할 수 있는 간단한 호구 조사가 시작됐다. 중년 남자는 서울에서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는 두 딸의 가장이었다. 그런데 제주에 급하게 인테리어 관련 일이 생겨 두 달간 머물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제주에 도착한 지 4일 정도 됐는데, 두 달의 짧은 기간이지만 편하게 오고 갈 수 있는 단골 식당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인은 “바로 여기네!”하며 격하게 환영했다.
중년 남자에게도 내 호구를 전했다. 나도 마침 건설 자재 관련 회사를 다니고 있어, (깊이 연관은 없지만), 짧게 ‘시멘트 파동’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주에 왜 혼자 왔냐는 질문에 너무 길지 않게 글 쓰기 여행 중이라고 전하자, 낭만 있는 친구라는 칭찬을 들었다. 개인적으로 낭만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래 봤자 일기 같은 글 몇 개밖에 쓰진 않았지만 괜스레 뿌듯했다.
그렇게 세 명은 별의별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20년 전 이수역 근처에 있던 유일한 포장마차의 어묵 이야기부터 요즘 공사 인부들의 태도 등 처음 만난 이들이 나눌 수 있는 모든 이야기는 한 것 같다. 주인은 ‘이때다’, ‘옳다구나’에 이어 ‘좋구나’하며 냉장고에서 브레이크 타임 서비스라며 무알콜 맥주와 날계란 두어 개를 더 내왔다. 스키야키에 시원한 맥주, 추가 날계란까지. 정말 꿀떡꿀떡 넘어갔다.
그렇게 음식을 다 먹고, 우리 셋은 무심하게 안녕을 고했다. 처음 보는 사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숭 없이, 잘 보일 필요 없이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들과 다시 마주치긴 기적에 가깝겠지만, ‘건강하세요!’ 하며 무운을 빌어주는 것까지 한 끼의 평범한 식사치곤 완벽에 가까웠다. 이게 진정한 혼자 여행의 묘미일까 싶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선 윤종신의 <불멍>이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노래 가삿말이 더욱 와닿는다.
“몰라 오길 잘한 것 같아, 숨 다운 숨을 쉬어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