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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혁 Jun 11. 2023

발길 따라 제주 넘은 이야기 ⑥

가파도, 그리고 섬의 이야기

2023년 6월 6일 제주 여행 2일 차


작년 가을, 좋은 기회로 가수 윤종신 콘서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통해 매달 1곡 이상의 작업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사실 그동안은 <오르막길>·<지친 하루>와 같은 메가 히트곡만 알았지 그의 발자취를 계속 따라가고 있진 못했다. 그러던 와중 콘서트에서 그가 소개한 <월간 윤종신> 신곡이 심금을 울렸다. 바로 <섬>(2022)이다. 가삿말을 잠시 살펴보자.


거침없던 상상들 늘 맞을 것만 같던 결정들
이젠 불확신의 속내를 숨기네
난 어느새 멈춰 서서 세상의 속도를 구경해
따라가기엔 저 멀리
날 기대던 사람들 늘 내게 답을 구했던 질문들
이젠 다들 알아서 잘 해 나가네
다 고마워 함께 했던 나와의 시간이 조금이나마
너의 삶에 도움 됐길 바랄게
나 가까이 떠있는 섬이 될게
날 좋으면 작은 배를 타고 내게 와줘
너만 와 모두의 얘기는 자신이 없어
둘이 나눈 소소한 비밀 이 섬 만의 꽃들이 될 거야
자 가끔 손 흔들어 줄래 섬을 향해
거기 가쁜 숨을 한번 돌리고 싶을 때
사랑해 멀리 떨어져 얼굴 못 보아도
너도 언젠가 너만의 섬으로 나를 초대할 거야 (이하 생략)



이 곡을 부르기 전, 그는 곡을 쓰게 된 이유를 비롯해 청자가 어떤 메시지를 받았으면 하는지 간략한 설명을 보탰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치열한 삶을 지냈던 이삼십 대를 지나 오십 대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니 결국 내가 해야 할 역할은 한 걸음 물러선 '섬'이었다고 한다. 빠르게 변화하고 진화하는 육지를 멀리서나마 응원하며 바라보고 있는 섬, 그리고 육지에서 지친 이들이 가끔 나의 섬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세상사를 털어놓으며 쉬다가는 곳. 그게 지금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내게 적잖이 큰 충격을 주었다. 이제는 커리어적으로 후배들에게 예우를 받거나 은퇴 후 안락한 삶을 이어가도 모자란 시점일 텐데, 그럼에도 자신만의 섬을 열심히 가꾸고 있을 테니 네가 지칠 때 가끔 놀러 와 달라니. 육지에서의 내 고민과 하소연, 기쁨과 슬픔 등의 이야기가 결국 그의 섬의 꽃이자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잠시 글을 내리고 지금 바로 들어보길 추천한다!



문득 그의 곡이 생각나 홀린 듯 가파도 배편을 예매했다.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본다는 새로운 느낌보단 섬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여러 블로그를 살펴보니 가파도에선 자전거를 빌려 시원하게 섬을 한 바퀴 둘러볼 것을 추천하던데,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섬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섬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심산이었다. 감사하게도 내 의도를 잘 알아차려 준 맑은 날씨도 나와 걸음을 함께 했다.


섬의 섬, 가파도의 첫인상은 정말 조용했다. 당시 배를 같이 타고 온 인원이 5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 다수가 자전거를 빌려 슝 앞질러가자, 새근새근 새소리와 '반가워!'라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지도도 펼치지 않고 마음과 시선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소담한 골목골목을 지나 걷다 보니 푸른 들판이 나를 반겼다. 누가 애써 예쁘게 꾸며놓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나는 섬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잠시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가파도가 후후 내어준 시원한 바람에 금방 땀을 식힐 수 있었다. 후-.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니 그제야 절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섬과 대화를 시도했다.



음, 요즘 고민이 있다면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옳은 건지'에 대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매 순간 내 앞으로 주어지는 선택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혹은 내 선택이 옳은 방향에 가까운 건지 알고 싶은 조급함이 있는 것 같다. 방금 말했듯,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은 없기에 더욱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최근까지는 다음 고민들이 머릿속에 있었다. 예컨대 20대 초반보다 대폭 좁아진 인간관계를 보며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고 있는지,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꼭 잘해야야 만 하는지 등의 생각이 끊임없이 늘어졌고, 또 지금 쌓고 있는 커리어가 훗날 빛바래진 사진이 되진 않을지, 지속성과 전문성이 있는 분야인지 등 현실적인 고민도 이어졌다. 또 하다못해, (말하기 부끄럽지만),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이성에게 알고 보니 오래 만난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마음을 어떻게 접어야 하는지 등 가슴 아린 고민도 있었다. 오랜만에 짝사랑 비슷한 설레는 감정이 훅 들어오니, 고장 난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이처럼 매 순간 주어지는 선택지에 어찌어찌 나름의 판단으로 선택은 해오고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고민들에 대한 선택의 결과가 당장 눈앞에 나타나진 않기 때문에 하루빨리 결과를 보고 싶은 조급함이 있다. 공상과학 소설 <숨(exhalation)>(Ted Chiang)의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내 미래를 보고 올 수 있는 미지의 포털이 있다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다.



주책없는 고민 털이에 그(가파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그는 되레 고갤 끄덕이며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었다.


이윽고 그는 바닷바람과 햇살, 풀내음과 새소리를 살며시 내어주며 말했다.

언제든 다시 와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가까이 떠 있는 섬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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