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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예 Oct 07. 2020

가을 바람이 두려워서

나에게 힘내라고 쓰는 글

지난 몇 주 사방에서 번지는 산불로 인한 연기와 재 때문에 거의 한 달 내내 창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가끔 바람 방향이 바뀌어서 잠시 AQI지수가 낮아질 때면 얼른 집안의 모든 창문을 잠깐이라도 활짝 열어두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오랜만에 열었더니 맞바람에 바깥바람이 훅 들어왔다. 시원한 걸 보니 벌써 가을이 왔나 보다.


매년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 말이면 새 학년, 새 학기 시작에 맞춰 한국에 있는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와서 하는 일은 매년 비슷했다. 스토리지에 있던 짐을 빼오고 이불을 빨아서 매트리스 위에 씌우고 옷장을 정리한다. 학교 스토어에 가서 새 교과서를 사 오고 수업 스케줄과 동선을 확인한다. 정신없는 첫 몇 주가 지나면 어느새 9월이 된다. 이제 좀 적응했다 싶을 때면 다음 수업을 위해 캠퍼스 빌딩을 오가는 사이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이 꽤 시원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나는 유학생활 내내 계절이 바뀌고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가을바람을 싫어했다. 더운 날 뒤에 오는 시원한 바람은 기분을 좋게 해 주지만 동시에 본격적으로 외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을 알려주는 예고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바람은 마치 가까운 미래의 내가 빰을 때리는 것 같았다. '각오해, 끔찍한 겨울이 오고 있어.'라고 말하는 미래의 나는 텅 빈 마음을 모른 척한 채 시험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큰 프로젝트나 학기 말 final essay를 쓰기 위해 수척한 얼굴로 고군분투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해가 짧아져서 6시면 깜깜 해지는 학교 기숙사에서 숙제하면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부러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았다. 방 안의 조명이란 조명은 최대한 밝게 켰다. 부모님에게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도, 아니면 친구랑 같이 시간을 보내도 마음이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지금도 가을바람을 맞으면 어쩌다 한 번씩 그때의 서늘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하긴, 15살부터 학교를 떠난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매년 반복해서 느꼈던 감정이니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보다 더 단단해진 것 같다. 작년 12월부터 아침 새벽에 일어나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운동을 하고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하고 머리와 가슴을 채워주는 독서도 매일 하고 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막연히 들어있던 불안, 걱정, 그리고 고민을 글로 풀어내는 시간도 가지고 있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며, 손으로 글을 끄적이며, 그리고 눈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보듬어주고 사랑해주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나를 사랑하는 이 시간을 통해 마음을 채우고 더 단단해졌다.


최근에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다. 그 후 새로운 환경을 찾아보기로 결정하고 몇 개의 팀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만약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 상황에 처했다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두려움을 느끼며 좌절했을 것이다.  불안하고 허전한 마음을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채워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공허함이나 두려움을 느낄 때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끝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시린 바람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분명 학창 시절 때 느낀 바람과 같은, 예전에는 두려워서 피하고 싶었던 바람인데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라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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