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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과현 Dec 02. 2019

안녕, 나의 위장 청소년

2017 잡지 어린이와 문학 특별기고

교통카드를 찍으면 더 이상 소리가 두 번 울리지 않는다. “삐-빅”에서 “삑”으로,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딱 한 음절이 없어졌을 뿐인데 내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졌다. 더 이상 ‘청소년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학교 밖 청소년’이 되면서 나는 온갖 임기응변으로 스스로를 지켜왔다. 사복을 입고 평일에 돌아다니면 늘 내 “삐-빅” 두 번 울리는 교통카드에 시선이 쏠렸고, 나는 두 번 울리는 교통카드 소리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니까 내가 ‘청소년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밝고 명랑하게 그리고 조금 어눌하게 인사해왔다.


대중교통, 영화관, 미술관, 만화방에서 청소년 할인을 받으려면 ‘청소년 같아야’ 하지만, ‘학교 밖 청소년’으로서 바깥을 돌아다닐 때 안전하려면 ‘성인 같아’ 보여야 한다. 나는 양쪽을 연기하면서 지쳐있었다. 화장을 하고 또박또박 말하면 다들 내가 직장인인 줄 알았고, 평일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대학생인 줄 알았으며, ‘청소년 같은’ 옷을 입고 ‘청소년처럼’ 말하면, 그제야 내가 ‘청소년’인 줄 알았다. 내가 청소년이 아니면 세상은 도대체 누구를 청소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누군가를 청소년이라고 판단 내리는 기준은 무엇이고, ‘청소년’이라는 분류에 속해있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억울해질 때면 자주 청소년 소설을 읽었다.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온갖 징글맞은 ‘청소년다움’이 거기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내게 필독을 권장했던 청소년 도서들을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청소년 소설을 읽는 청소년


나는 필독도서와 권장도서, 학급문고를 최선을 다해 싫어했던 사람이다. 읽고 싶지 않은 책을 강제로 읽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았고 그 책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써야 하는 독후감도 지긋지긋했다. 늘 잔뜩 

성을 내며 읽었으니 마음 편한 독서일 리 없었다. 학급문고 앞에만 가면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책들이 내뿜는 오라(aura)가 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친구네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먹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 같은 것이다.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니?”, “공부는 잘되어가니?”, “부모님은 뭐하시니?”, “남자친구는 있니?”,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아도 된단다. 지금 당장.” 입안에서 씹히는 과일은 달고, 나를 위해 차려놓은 과일 상이

라는 걸 알겠는데도 속이 거북해지는 ‘의도’ 말이다.


실제 청소년의 삶이 있고, 그 삶을 반영한 이야기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자라면서 만나게 되는(자신이 직접 창작하거나, 전해 듣거나, 경험한)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어떤 매체를 통해 걸러졌을 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와 ‘아닌 이야기’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된다. 똑같이 청소년인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지만 청소년 문고에 어떤 이야기는 나올 수 있고 어떤 이야기는 나올 수 없다. 나는 청소년 소설

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이야기에 매료되기보다 이 이야기가 선별될 수 있었던 이유에 골몰했다. 어떤 기준으로 이야기가 걸러지는가. 누가 이런 이야기를 선호하는가. 이걸 우리에게 왜 읽히려고 하는가. 우리가 이 책을 읽

었을 때 뭘 느끼길 바라는가.


필독도서, 권장도서는 ‘필독을 권장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서사’와 ‘선호하는 청소년 상’, ‘청소년이 할 법한 고민’, ‘청소년이 겪을 만한 갈등과 모범적인 해결 양상’이 무엇인지를 거꾸로 증명해버린다. 청소년 소설, 청소년 문고, 단체 추천 권장도서라는 이름이 강제성을 띤 독서교육과 만나면 작가와 작품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 유통구조 속에서 의도라는 것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청소년 소설에 나오는 청소년 


도대체 청소년은 뭐고, 청소년이 읽어야 하는 소설은 또 뭘까? 나는 청소년이라는 분류가 대상의 특수성을 고려한 분류가 아니라 성질이 뚜렷한 두 집단 사이를 어떻게든 연결하기 위해 뚫어놓은 터널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

다. 아이에서 출발해 어른으로 향할 때 넘어야 하는 삶을 산이라고 하고, 살아내는 일이 긴 등산이라고 생각해보면, 개인은 그 산에서 종종 조난당하고, 겨우 발견한 열매로 허기를 달래면서, 운 좋게 마주친 절경을 감상하는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등정을 완료하게 된다. 그런데 ‘청소년기’라는 이름은 이 등정 과정을 모르는 남이 내 산에 뚫어버린 터널처럼 휑하게 느껴진다. 청소년 소설을 읽을 때면 실재하는 청소년인 나와 청소년 소설 속 청소년 사이의 괴리감을 계속해서 느껴야 한다. (방가방가 하이루 담탱 열나 짱나, 내 절친은 울트라캡숑 일진짱이라고 말하는 또래 주인공을 봤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일단 둘째 치자.) 세상에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삶은 천차만별이다. 학교 밖 청소년만 해도 중퇴생, 자퇴생, 비진학생, 대안학교 학생, 검정고시 준비생 등 저마다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한꺼번에 ‘학교 밖 청소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자퇴한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해줄 수 있는 학교 밖 청소년은 무척 드물고, 그 한마디를 위해 몇 날 며칠 과거를 곱씹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소설에서 재현해내는 ‘자퇴생’은 학교폭력 가해자거나 피해자에서 그치고 있다. 다른 산을 타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읽고 있음에도 매번 같은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소외된 청소년을 다루는 일이 어쩌면 소재화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유사한 가난, 유사한 슬픔, 유사한 폭력의 서술이 반복된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한국 청소년 소설의 클리셰는 다음과 같다.


1. 주인공은 한 부모 가정이거나 다문화 가정이다. 

2. PMP와 MP3, SNS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기기를 빼앗는 어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반드시 싸워야 한다.)

3.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어머니/삼촌/고모 등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대가 있다.(그들에게 자주 마음속으로 편지를 쓰며-진짜 편지를 쓸 때도 있다.-위안받는다.)

4. 친한 친구는 자살한다.(친하지 않은 친구더라도 일단 자살한다.) 친구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5. 인도나 몽골에 자아 찾기 여행을 가거나(기본적으로 해외, 무난하게

는 바다. 종종 이세계(異世界)로 넘어간다.) 특이한 취미(비인기 스포츠, 비보잉, 코스프레, 팬클럽, 동아리 활동)에 빠져서

6. 별난 친구를 만나(지금까지의 주인공 삶에 경종을 울리는 존재여야 한다.)

7. 성장한다.


내가 읽어왔던 청소년 소설들을 짜깁기하면 얼추 1번부터 7번의 전개가 된다. 물론 이 농담으로부터 내 부족한 독서 내용을 거꾸로 짚어 볼 수도 있다. 나는 모든 한국 청소년 소설을 읽어본 것이 아니고, 이 농담은 소설 

사이의 겹치는 설정을 과격하게 단순화시킨 것이니까.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더라도 이야기의 결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면 꽤나 그럴듯한 청소년 소설 한 권

을 금방 상상해낼 수 있다. 각 번호를 다른 조합으로 묶거나, 새로운 요소를 추가해서 유사한 이야기들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도 있다. 주인공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다문화 가정의 소년·소녀 가장이든 부

모님의 이혼 과정을 지켜보며 몰래 춤 연습을 하는 비보이든, 친구의 죽음을 추적하는 영능력자(靈能力者)이든 어떤 요소를 가져와 섞더라도 그것이 익숙한 구조 안에서 전개된다면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니까. 

‘성장 서사’라는 이름의 장르적 합의 말이다.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성장해버린다.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자라기 마련이니까. 문제는 이 청소년을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지가 소설 속에서 훤히 보일 때다. ‘이 사건을 통해 너는 곧 이걸 느끼겠지.’ ‘그러면 이걸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이렇게 자라겠지?’ 인물이 작가가 바라는 성장을 완료하는 동안 청소년은 성장의 주체가 아닌 성장 서사를 위한 도구이자 소재가 되어버린다. 청소년 소설 속에서 청소년이 청소년일 수 있는 이유는 아이와 어른이라는 대조군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청소년과 비교해 아이와 어른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보면 주인공의 성장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 자신의 과거는 어떠했는가, 자신의 미래 위치에 서 있는 어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서로 대립하는가, 어떻게 공존하는가, 나는 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아이/어른이라는 대조군과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내용이야말로 주인공 청소년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 대조군인 어른이나 아이는 다양하게 그려지고 있을까? 자식을 들들 볶는 히스테릭한(여성 혐오라고 느껴질 만큼) 엄마, (늘 그래왔듯이)무관심한 아버지, 성적으로 차별하는 선생님(성적(性的)으로 차별하기도 한다), 잘난척하는 옆자리 짝꿍(대부분 ‘깍쟁이’ 여자아이)……. 더 다양한 젠더와 인물상이 조명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글로 쓰이는 이야기라면 제약을 벗어나 더 과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청소년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외연을 넓혀가는 이야기보다 그 안으로 수렴되고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규제를 재확인하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왜일까? 소설 속에서조차 작은 일탈만이 허용되는 것일까?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 전달하는 문학 속에서 또다시 대상화 되는 약자를 발견할 때, ‘대신 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게 되는지 자주 생각했다. 어느 청소년 문고에는 매 작품 뒤에 작품을 읽고 나서 수행할 수 있는 학습지가 나와 있다. “이 갈등에서 주인공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자기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할지 써보세요.” 나는 자꾸만 이 질문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청소년의 삶을 언어로 다듬어 이야기로 엮는 일이 정말 ‘청소년 소설’일 것이라고 섣부르게 믿어도 될까? 

의도한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대상화된 인물들이 모여 그 인물에 기초한 이야기가 재생산되고, 그것이 필독도서로 지정되어 같은 연도에 태어난 청소년들에게 읽힐 때, 나는 그것이, 청소년 소설이 무심코 제안해버리는 ‘청소년 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소설을 쓰는 청소년


“소설을 쓰면 돼.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소설.” 
(청소년 희곡집 『B성년』(이음스토리, 2013) 중 이오진 작가의 「바람직한 청소년」 중에서


권장된 청소년 상을 실제 청소년들이 다시 재현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 로 각종 문학 공모전과 백일장 자리다. (나는 이 대회들을 ‘청소년’ 공모전, 백일장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소수의 백일 장을 제외한, 특히 대학 진학에 유리한 대회일수록 참가 자격을 ‘고등학교 재학생’으로 제한 하고 있다. 모든 청소년이 ‘고등학교 재학생’이 아니며 그럴 수 없음을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청소년 문학이란 무엇인가. 청소년이 나오면 청소년 문학인가, 청소년을 대상 독자로 두고 쓰면 청소년 문학인가, 청소년이 쓰면 청소년 문학인가. ‘백일장 키드’로 자라 하나 배운 점이 있다면 적어도 청소년이 쓴 글을 세상은 쉽게 청소년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너희들이 아는 걸 써.” “너희들이 경험한 걸 써.” 글짓기 대회의 사회자가 공지하는 내용은 ‘그러니까 청소년다운 걸 써.’로 수렴된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고정된 형식이 이미 있고, 청소년의 입을 빌려 듣고 싶어 하는 내용 또한 이미 있다. 나는 함께 백일장을 다닌 친구들과 “청소년이 쓰기를 기대받는 이야기는 ‘톡톡 튀는 슬픔’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발칙하지만 무례해서는 안 되고, 사춘기의 존재론적인 고민을 품고 방황하지만 주인공 청소년이 겪는 비극의 정도가 어른들이 경악할 정도로 지나쳐서도, 감정을 묘사한 수위가 노골적이어서도 안 된다. 문장력이 훌륭하되 기성 문인 같은 느낌을 내어선 안 되며 고유한 ‘청소년다움’을 유지해야 한다. 요컨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꾸미지 않은 민낯(그러나 전지현)같은 작품이다. 청소년이 쓴 ‘청소년 소설답지 않은 소설들’은 청소년 하위문화로 분류되고, 서브 컬쳐 안에서만 제대로 평가, 향유된다.  실체 없는 ‘청소년 상’은 실재하는 청소년을 요긴하게 통제할 수 있다. ‘청소년 상’과 ‘청소년이 쓴 청소년 소설 상’의 요소를 모아놓으면 실없는 

농담, 어쩌면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청소년은 이 잣대로 상을 받거나 받지 못했고, 실적을 쌓거나 쌓지 못했고, 대학에 가거나 가지 못했다. 다음은 규모가 큰 청소년 백일장 중 하나로 꼽히는 대산청소년문학상

의 심사평에서 발췌한 글이다.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예 공모의 시 부문은 생활 서정을 기본으로 한다. 일상 또는 삶의 여러 체험들에서 생겨난 감흥을 시의 형식을 빌려 의미 있게 재구성한 글을 요청한다는 뜻이다. (중략) 그러나 일부 작품들은 청소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의 언어적 세련을 보이고 있었다. 선자들은 이에 대해 놀라기도 했지만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내용을 마련하기 전에 그릇을 치장하기 바쁜 선행 학습의 그늘이 느껴져서였다. 기성 시의 조급한 흉내 내기는 (중략) 막연한 상념은 청소년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나 언어의 명징성은 시의 기본이란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2016년 시 심사평)

“고등학생은 고등학생다운 문제의식과 진지성, 치열성을 보여주는 작품에다 비중을 실었다. 중학생은 중학생다운 꿈을 보여주는 시, 또한 그 학생만이 쓸 수 있는 개성적인 작품을 찾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 (중략) 중학생다운 현실 인식과 고민으로 형상화해 내는 독창성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2015년 시 심사평)

“밤하늘의 별빛이 내려와 박힌 듯한 중학생들의 순수한 눈빛과 해맑은 수줍음 (중략) 생기 넘치는 호기심과 톡톡 튀는 질문을 해오는 고등학생들의 말소리는 어른들의 일상에 찌든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중략) 그럼에도 중학생다운 소박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2014년 시 심사평)

학교폭력, 왕따, 자살 등 응모작에서 자주 보였던 낯익은 소재와 패턴

(2014년 소설 심사평)

고등학생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중략) 신선한 은유로 무장한 표현들에서는 청소년 특유의 생기발랄한 정서를 엿보는 즐거움마저 누릴 수 있었다.”(2013년 소설 심사평)

“천여 편이 넘는 작품들은 과연 이것을 청소년들이 썼을까, 의심할 정도로 문장과 구성, 주제의식 면에서 완성도가 높았다. (중략) 중학생들의 소설 응모작품은 전체적으로 이것이 과연 중학생들의 작품일까 싶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2012년 소설 심사평)

“청소년들의 풋풋한 열정이 새로운 작품 창출로 이어지면 좋으련만 그만그만한 ‘당선용’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중략) 매번 청소년다운 발랄한 상상력과 기성 시인을 흉내 내지 않는 멋진 표현력을 기대하지만 이런 기대를 충족게 하는 작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중략) 억지로 꾸며서 쓴 시보다는 가슴에서 우러나와서 시를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2011년 시 심사평)

“안타깝게도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 즉 십 대 고등학생의 생활이나 고민 등을 담기보다는 (중략) 창작을 배운 선생님이나 기성 시인을 모방하려는데에 그치는 문제점이 드러났다.”(2010년 시 심사평)

자기 나이에 맞는 사고와 인식과 통찰을 원했던 심사 위원들로서는 오히려 염려가 될 정도였다.”(2010년 소설 심사평)

“글쓰기가 연마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나, 이로 인해 청소년들만이 할수 있는 서투르지만 전복적이고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가 약해질 수 있다는 전망 (중략) 작품 선별을 위해 무엇보다 눈여겨본 것은 첫째, 청소년다운 상상력과 세계관이 형상화되어 있는가, 둘째, 청소년답게, 상투적이지 않고 신선하고 뚜렷하게 주제를 파악하고 있는가.”(2009년 소설 심사평)

“청소년기에는 그 나이에 걸맞는 사고가 중요한 것이지 섣부른 어른 흉내나 기성의 낡은 관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2008년 시 심사평)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년에 걸친 심사평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9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년 비슷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매해 빼놓지 않고 ‘청소년다움’, ‘고등학생다움’, ‘중학생다움’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가 심사에 직접적인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고, 청소년을 수식하는 화려한 꾸밈말들이 놀라울 만치 유사하다는 것 또한 놀랍다.(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청소년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썼다.’는 말은 무려 칭찬이다. 청소년 문학상의 심사 위원들은, 매년 청소년들의 글쓰기 실력이 일취월장해 가나, 그것이 ‘어른 흉내’, ‘기성 문인 흉내’에 그치는 것이 아닐지 꾸준히 염려하고 있다. 

생활 서정을 기반으로 한 글을 요구하기 전에, 다양한 청소년이 보여줄 생활 서정의 층위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냐고 묻고 싶다. 왕따, 자살, 학교폭력 등 비슷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쓴다고 말하기 

전에, 학교 밖이라는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냐고, 재학생들에게 그 이상의 생생한 소재를 요구할 수 있을 만큼 학교가 다양한 경험을 허용하고 있냐고 묻고 싶다. 청소년다운 문학에 대해, 청소년이 쓸 법한 문학에 대해 선

을 그어두고 ‘청소년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썼다’고 말할 때, 청소년의 자리를 ‘여성’으로 바꿔 읽어보라고, 무엇이 보이냐고 묻고 싶다.

‘자기 나이에 맞는 사고와 인식과 통찰’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고등학생다운 문제의식’과 ‘중학생다운 꿈’이 도대체 뭘까? 그 기준을 정하고 ‘진정성’을 심사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왜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 문학을 독자로서 향유할 때나 작가로서 향유할 때나 실재하는 청소년은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있다. 청소년을 수식하는 말들에 자신의 몸을 맞추지 않으면, 어떤 곳에서는 ‘청소년다움’을 결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자신이 청소년임에도 내가 쓰는 글은 ‘청소년답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어른 글과 청소년 글이 마치 따로 있는 것처럼 군다. 성인도 미성년도 그저 글을 쓸 뿐이다. 같은 세상 같은 시간에 살아있는데, 이토록 격리

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청소년들을 ‘청소년 상’ 속에 가둬두는 순간 비재학생 청소년이, 노동하는 청소년이, 장애를 가진 청소년이 그리고 그 청소년의 형제인 비장애인 청소년이, 청소년이, 청소년이……. 하나둘

씩 지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청소년 상’은 어떤 청소년 주체도 포용하지 못하고 다시 실체 없는 소문이 되어 실재를 잡아먹는다.


2014년 4월 16일 이후에 주최된 수많은 청소년 백일장들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3월부터 이어지는 여름, 수시 전까지 ‘백일장 키드’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수상 실적을 확보하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온갖 백일장을 돌아다닌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백일장 본선에 진출한 친구가 쉬는 시간에 내게 경악하며 전화했던 것을 기억한다. 본선 주제에 ‘바다’가 나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월호 때문에 올라온 주제 같다고. 옆에 앉아있는 아이가 세월호 관련 자료를 파일철에 모아놓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을 묘사한 시가 수상작으로 뽑혔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차례차례 전국의 백일장에 나가 있는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또 나왔어. ‘세월호’야. 뒤에 분향소를 차려놓고 주제에 세월호가 나왔어. 연락을 받을 때마다 낯이 뜨거워졌다. 나도 친구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세월호가 주제로 나온 순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심사위원들이 어떤 글을 보고 싶어 할지. 어떻게든 상을 하나라도 더 타야 하는 친구든, 글 쓰는 게 좋아 놀러 온 친구든, 공원을 산책하다 들른 친구든 청소년 백일장에서 세

월호를 주제로 내면서 아이들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 저열하다고 느꼈다. 무엇도 수습되지 않은 시기, 밀면 울컥하고 다들 눈물이 쏟아지던 때에 어떻게 그렇게 섣부를 수 있었는지 3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해가 되

지 않는다. 그 백일장에 어떤 연고를 가진 청소년이 와서 앉아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천천히 백일장에 발길을 끊었고 이후로 ‘청소년 소설’을 오랫동안 쓰지 못했다.


청소년다움을 넘어 


청소년 소설을 읽는 청소년, 청소년 소설에 나오는 청소년, 청소년 소설을 쓰는 청소년. 이 세 명의 청소년이 모두 소외되지 않을 때, 독서의 주체가 되고 성장의 주체가 되고 창작의 주체가 될 때, 나는 비로소 마음 편히 

청소년 소설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문학동네 청소년 테마소설 『존재의 아우성』(이금이 외, 문학동네, 2015년) 엮은이의 말을 곱씹어본다. “존재의 아우성은 앞서 출간된 테마 소설집들과 같이 청소년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교훈을 전해 주려 하지 않습니다.” 편집부는 물론이고 창작하는 작가들도 함께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청소년 소설은 조금씩, 분명하게 달라지고 있다. 내가 지금 아동·청소년기를 다시 보내고, 새로 나오는 책들을 접하게 된다면 다른 기억과 경험을 가진 또 다른 나로 자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편견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한 독서가 오히려 내 안의 편견을 더 굳혀버렸는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보고들은 ‘청소년 상’을 토대로 내 ‘청소년 연기’는 점점 완성되어 갔지만, 최근에 나온 청소년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

작하며 나는 그런 내가 안쓰러워졌다. 너무 상처받지 말고 작은 변화들에 애착을 가지는 독서를 할 수는 없었을까? 글쎄,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도 종종 성을 내면서 청소년 소설을 읽는다. 그럴 바엔 좀 그만 

읽으면 좋을 텐데.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 꾸역꾸역 소화했던 폭력들, 더부룩하게 얹혀있는 기억들, 툭 치면 곧 토해버리는 울렁거림을 잠재워줄 이야기를. 


한참 아동청소년보호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을 때 “19세 미만의 피해자가 외관상 청소년으로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범행이 일어날 경우 아동·청 소년 보호법이 적용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어른처럼 보인 10대女 성폭행, 아청법 적용 불가」(〈문화일보〉, 2014. 12. 7.) “당시 피해자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점, 범행 시간이 오전 3시 30분으로 피고가 그 시간까지 청소년이 술에 취해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지 못한 점 등을 참작하면 청소년으로 인식하고 범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 당시 나도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밤 늦게 돌아다니는 열일곱 살이었으니까. 피해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열여섯 살이었다. 외관상 청소년으로 보인다는 게 무엇인지, 외관상 청소년으로 보이지 

않으면 청소년으로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인지. 그때만큼 내 어린 나이와 청소년이라는 이름이 저주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때 꼭 하고팠던 시위가 있었다. 성년, 미성년, 재학생, 비재학생 여성들이 모여 서로 옷을 바꿔 입고 ‘누가 성인이고 누가 청소년인지 당신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를 묻는 시위였다.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그 기준은 어디서 학습되었는지, 그리고 그 판단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아동·청소년 문학이 더 다양한 청소년 주체들을 발견할 때, 청소년 스스로가 어떻게든 말을 꺼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끈기 있게 지켜보고 그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할 때 나는 이 ‘청소년 상’과 ‘청소년다움’의 바깥으로 달려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성년이 되었으면서 여전히 나의 미성년자와 함께 있다. 어딘가에서 또 ‘청소년인 척’하느라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성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견뎌내고 성년까지 자라준 나의 미성년자를 아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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