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작가마당 32호 예술의 윤리, 예술가의 윤리 특집호
서울대입구역에 서울대가 없고, 온양온천역에 온양온천이 없듯이, 청소년 문학계에는 청소년이 없다. 이 새삼스러우면서 낯선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청소년 문학이 ‘청소년이 향유하는 문학’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굳혀진 장르, 공고한 분류로서 기능해 왔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청소년이 등장하면 청소년 문학이다’가 해외 영 어덜트 소설의 분류에 해당한다면, 국내 출판-문학계는 ‘청소년을 대상 독자로 둔 것이 청소년 문학이다’는 자세를 고수해왔다. ‘비청소년이 청소년을 위해 창작한 소설’을 청소년 문고로 묶어왔고, 이렇게 묶인 책들이 권장도서-독서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선택권 없이 제공되며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여태껏 청소년 문학은 청소년에게 ‘주어진’ 문학이었다. 청소년이 쓰지 않고, 만들지 않고, 읽지 않아도 청소년 문학이 꿋꿋이 ‘청소년 문학’일 수 있었던 이유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에 「안녕 나의 위장 청소년」과 「나는 너랑 섹스할 안드로메다 소녀가 아니야」를 기고하면서, 나는 실재하지 않는 ‘청소년다움’이 실재하는 청소년을 어떻게 억압하는지, 청소년 문학과 필독도서 문화가 그 ‘청소년다움’을 만들어내는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청소년 백일장이 ‘청소년다움’을 어떻게 청소년들에게 재생산하게 만드는지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도 인연이 닿은 곳곳에서 청소년 소설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문화가 정말 기이하게 느껴졌다. 청소년 소설이 청소년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던 관계자들도, 막상 청소년이 쓴 청소년 소설이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하며 청소년 문학의 주체가 청소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는 조심스러워졌다. 청소년이 창작한 창작물의 완성도를 염려하거나, 기존 청소년 문학의 분류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반응을 접하면서 나는 이런 태도가 청소년 배제의 연장선에 있으며, 나아가 청소년-예술-예술계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보여주는 일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질문하고 싶다. 당사자가 주체가 아닌 당사자-예술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청소년은 왜 예술의 주체가 되지 못하면서, 자꾸만 예술과 예술계로부터 호명되는 걸까? 청소년 억압은 어떻게 청소년과 그의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나?
2018년 4월, 선거연령 하향 4월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농성장에서의 일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느 비청소년이 농성장을 기웃거리더니 청소년 참정권 농성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청소년 참정권 운동의 현재와 그 의의보다 국회의사당 근처의 결혼식장 위치를 더 자주 물어보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더없이 반가운 손님이었다. 설명을 해주기 위해 한 청소년 활동가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농성장의 자리를 지키는 보람이 이런 것일까 생각하며 비빔밥 한 숟갈을 꼭꼭 씹어먹다가, 활동가의 밥이 싸늘하게 식을 때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밥 반 공기를 비울 때까지 계속되고 있던 이야기는 바로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는 청소년’에 대한 지적이었다. ‘청소년처럼 운동하면 안 된다.’가 그의 요지로, 운동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좀 더 ‘어른스럽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시작된 이야기는 ‘너 여기서 이러는 것 부모님이 아시냐’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비청소년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있는 청소년 운동가를 보며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비청소년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왜 늘 우리의 몫이어야 하나? 무엇을 어떻게 얘기하던, 나이위계 안에서 이토록 쉽게 얕잡히고 말 일인가. 자리로 돌아온 활동가는 유독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는 곳에서 이런 일이 많다고 말해주었다. 차분하게 다음 회의를 준비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태도가 그 비청소년이 말한 ‘청소년스러움’에 해당할까 봐,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쟀다.
그의 말은 ‘말하는 청소년’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드러낸다.
“너”
청소년은 비청소년에게 자주 ‘너’ 혹은 ‘야’로 호명된다.
“여기서”
여기란 청소년이 ‘학생’이 아니라 감히 ‘시민’으로서 활동하는 ‘광장’을 의미한다.
“이러는 것”
청소년은 정치적 주관을 가질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럴’ 수 없으며
“부모님이 아시냐”
언제 어디서든 청소년의 의사결정은 부모의 통제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없는 지금, 공공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청소년은 사전상의 시민도 되지 못한다. 미숙하기 때문에 통제받아야 하는, 시민이 아닌자를 우리는 학생이라고 불러왔다. 학생은 독립된 개인이 아니기에 온전한 타인도 되지 못한다. 청소년은 보호하고 선도해야 할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소년처럼 운동하면 안 된다,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른스럽게 대처해야 한다’는 말은 곧 사회가 ‘청소년다운’ 말일수록 승인하지 않음을 함의하고 있다. 말하는 청소년이 부딪히는 것은 이런 승인의 벽이다. 말하는 청소년이 자신의 발언을 발언으로써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는 ‘어른스럽다’는 지표를 우선적으로 획득해야 한다.
쓰는 청소년의 경우 정반대에 해당한다. 쓰는 청소년은 ‘청소년다운’ 글을 써야만 제도권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가장 청소년다운 청소년이 누구인지 가리는 곳이 바로 청소년 백일장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백일장은 ‘누가’ 청소년인가, ‘무엇이’ 청소년의 글인가 판단하고 이를 대학 입시와 결부시키고 있다. 아직도 많은 청소년 백일장이 재학생을 기준으로 참가자격을 부여하고 있으며, ‘청소년다움’이란 이데아에 얼마나 근접한지를 두고 심사한다. 그때 학교 바깥에 있는 비재학생 청소년은 백일장에 참여할 수 없고, 청소년이 썼지만 청소년 답지 않은 글은 시상권에 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읽는 청소년은 어떨까? 읽는 청소년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검열 안에서 주어진 독서목록을 소화하는 자다. 선택권 없는 독서교육은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원치 않는 독서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이때 검열을 통과한 책은 비청소년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엮어낸 청소년 도서이다. 청소년은 이것을 읽고, 마땅히 소비해야 한다.
청소년이 말할 때, 사회는 청소년에게 동등한 발언권을 주지 않는다. 청소년이 쓸 때, 사회는 ‘청소년다운’ 가치에 상을 주는 방식으로 청소년을 대상화한다. 청소년이 읽을 때, 사회는 청소년이 읽을 것을 선별하고 제한한다.
이런 억압은 왜 일어나는가? 우리가 말하고, 쓰며, 읽기 때문인가? 아니다. 우리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청소년에 대한, 쓰는 청소년에 대한, 읽는 청소년에 대한 억압은 서로 이어져 있다. 우리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존재로 인해 부정된다. 어떤 행위를 하든 우리가 청소년이라는 존재인 이상, 청소년-예술도 이 도식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청소년 없는 청소년 문학, 당사자 없는 당사자 예술이 탄생한 이유는 사회는 물론이고 예술마저 청소년을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인격과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청소년은 당사자가 아니라 대상자일 수밖에 없다. 대상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분히 호의적이며, 동시에 시혜적인 것들이다. ‘비청소년이 청소년을 위해’ 즉 이 문화가 ‘너희를 위해서’ 준비되었다는 일방적임은 청소년-대상자-예술의 근간을 가장 잘 설명한다.
청소년 예술이 당사자 예술이 아니라 대상자 예술일 때, 왜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문제는 분명히 심화 되고 있었다. 우리가 이 사실에 무뎌지는 쪽으로.
청소년에게 허락된 예술은 교육이라는 거름망을 거친 뒤의 예술이다. 예술이 이 거름망을 통과할 때, 즉 예술이 교육 가능한 형태로 가공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교육의 일부분이 된 예술이 청소년 억압의 문제 또한 내포하게 되기 때문이다.
배울 의의가 있다는 작품들은 늘 청소년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별되었다. 그 의의를 익히는 것이 고스란히 학습목표가 되었고, 작품을 즐기기 이전에 청소년은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을 배울지, 또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의 교육이 이뤄지기를 원하는지 청소년이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은 참정권이 없는 문제, 청소년이 비시민인 문제와 궤를 같이한다. 선택권이 없는 상태를 ‘학습’할 것. 정치적 무력감의 학습이 교육이라면, 예술 본연의 가치는 이 앞에서 무색해진다.
무엇이 ‘배울만한’ 예술일까? 무엇이 청소년에게 ‘이로운’ 가치일까? 그리고 그것을 ‘정하는 자’는 누구일까? 제도는 청소년에게 어떤 예술은 교과목에 포함 시키는 방식으로 반드시 접하게 만들면서, 어떤 예술은 나이규제를 통해 결코 접할 수 없게 만든다. 청소년에게는 예술을 주체적으로 접해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 미디어 교육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배제가 이루어지는 지금,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며, ‘유해한 것’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의 뒤에 진 그림자는 명백한 통제의 이데올로기다. 정책구성 및 결정 과정에 개입할 수 없는 청소년 당사자는 ‘무엇이 권해질 것인가’ 는 물론이고 ‘무엇이 차단 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발언권을 얻지 못한다.
미성숙한-미성년자와 성숙한-성인이라는 위계에 따른 이분법은 이때 효력을 발휘한다. 압수된 권력에 붙는 조건부, 즉 너희가 마땅히 ‘성장함’에 따라 이 권력이 다시 주어질 것이라는 단서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더욱 촘촘한 위계구조인 후배-선배 구도를 만들어낸다. 이상적인 ‘성인’ ‘기득권’에 가까워질수록 그만큼의 권력을 부여받는 구조에서 자유와 평등을 기조로 하는 예술교육이 이뤄질 수 있을까? 청소년기의 이 경험은 예술 학과와 예술 대학의 위계폭력 문제, 나아가 예술계 내부에서 위계폭력이 재생산되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청소년을 위계로 줄 세우고 나면, 제도를 통해 그들을 통제하기 훨씬 수월해진다. 이때 입시제도가 된 예술은 입시의 방식으로 예술을 새로 재단하며, 입시를 통과한 작품과 통과하지 못한 작품, 통과할 작품과 통과하지 못할 작품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대학입시라는 승인구조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고, 제도가 만든 권력이 학생에게 차등적으로 배분되는 과정에서 학력에 의한 차별이 발생한다. 제도의 문제는 구성원들 간에 일어나는 폭력에 반드시 내포되어있다.
2016년 10월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단 내 성폭력 말하기 운동에서 습작생 1~6이 배용제 시인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했을 때, 우리는 그 배경이 되는 장소가 ‘예술’ ‘고등학교’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학교는 안전할 것이라는, 안전해 마땅해야 할 곳이라는 믿음이 또다시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발자5 계정이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트윗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네가 문학에서 벽을 마주하는 이유는 틀을 깨지 못해서 그렇다. 탈선을 해야한다.” ‘학교’가 위계폭력이 일어날 장소를 제공했다. ‘예술’이 그 폭력의 빌미가 되었다. 학생의 발언권을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입시와 유착된 예술은, 입시, 혹은 등단이라는 승인제도에 권력을 집중시켰고, 수직적 위계관계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청소년에게 허락된 예술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우리는 다시 사유해야 한다. 그것이 입시제도와 유착되고, 수직적 위계질서를 학습하며, 정치적 무력감을 일상화하는 예술에 한정된다면 만 24세 미만 청소년이 제도 안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이 중 하나 이상을 견뎠으며, 견디고 있으며, 견디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교육이 아닌 예술이 청소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창작자들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 때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점검하고자 했다. 더불어 청소년과의 작업을 시도하고자 하는 아티스트와 그런 기획들이 늘어났는데, 나는 그런 기획들을 통해 다양한 예술교류가 이뤄지길 바라면서도 예술 활동 속에서 정말 청소년들이 동등한 작업자로서 받아들여 지고 있는지,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리엔테이션을 열어 청소년과 예술 활동을 진행한 후 거기서 영감을 받아 연극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에서 청소년의 위치가 유독 모호했기 때문이다. 청소년과 창작자가 각자 무엇을 교환하고 있는지, 그 활동이 일방적이진 않은지, 청소년의 당사자성을 빌려와 비청소년의 작업에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이진 않은지 묻고 싶었다.
청소년과의 작업은 ‘교육의 연장선에 있는 체험’으로서 다루어진다. 협업을 통해 실질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때도 그렇다. 청소년은 동일한 작업을 실천하면서도 비청소년이 가르치고 이끌어야 할 ‘배우는 자’로만 다뤄진다. ‘아티스트’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과, ‘학생’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작지만 큰 차이를 가진다. ‘대우’도 마땅히 학습되기 때문이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주체 아닌자로서 체험하는 ‘예술 활동’이 아니라, 주체적인 아티스트로서 ‘존중받아보는 경험’이다. 청소년이 독립된 아티스트로서 존중받을 때, 청소년은 비로소 ‘개인’이 될 수 있다. 청소년기라는 층위로 읽혀버리기 일쑤였던 작업자 개인의 서정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소년은 예술활동의 학습목표보다, 세상이 나의 작업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예술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먼저 배우고 알아차린다. 청소년의 예술활동은 그 피드백이 오고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 피드백보다 예술적 체험활동의 빈도와 질에 더 집중한다.
나는 청소년의 예술활동이 지나치게 교육적 측면에서 강제되어왔다고 생각한다. 글짓기, 그림 그리기, 연극 만들기, 영상 만들기와 같은 다양한 예술 활동이 학교에서 교과 활동, 수행평가, 교내대회등으로 제공될 때, 청소년은 이 창작활동이 분명한 노동임을 잊게 된다. 지적생산 노동의 대가로 계속해서 비물질적인 것을 받는데 익숙해지면 이 창작활동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이것이 예술계 내에서 창작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젊은 창작자를 착취하는 것과 닿아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청소년 대회에서 수상한 청소년에게 현금을 주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상 방식을 보고 있으면, 청소년에게 마땅한 대가로 현금이 쥐어지는 순간 큰일이 나기라도 하는 건가 싶다.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좋을 텐데!) 이것은 시의적절한 경제교육과 노동교육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청소년에게 어떤 창작품을 만들게 하고, 거기에 대한 마땅한 지원과 대가를 약속하지 않으며 그 결과물만을 사업에 활용하는 것 또한 청소년을 쉽게 착취하는 일에 속한다. 이때 청소년을 예술가로 바꿔 읽어도 충분히 의미가 통한다는 건, 청소년 문제와 예술계의 악습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임을 암시한다.
청소년기에 겪은 예술과 예술활동은 남은 삶에서 이어나가는 예술경험의 근간이 된다. 왜곡된 예술활동을 체험하고, 부정적인 예술경험을 내재한 청소년이 자라날 때, 우리는 청소년에게 허락된 이것이 ‘아직’ 예술인지, 그렇다면 ‘얼마큼’ 예술인지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한다.
‘청소년 문학’이란 단어의 ‘청소년’은 ‘붕어빵’의 ‘붕어’에 해당한다. 붕어빵에서 아무도 살아있는 붕어의 맛을 기대하지 않듯이, 점점 청소년 소설에서 동시대 청소년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워졌다. 청소년 문학은 이제 독자적인 규격을 가지고 자리 잡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당사자-문학일수 있었던 ‘청소년 문학’이 비청소년 중심의 대상자-문학이 된 지금, 청소년이 쓴 작품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먼저 청소년의 글은 백일장으로 간다. 백일장과 문학상의 입맛에 맞춰 ‘청소년다움’을 연기하는 것은 그나마 제도의 혜택을 (겨우 나눠)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입시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백일장키드의 각축장에서, 비청소년의 승인을 받기 위한 글쓰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무척 소모적인 일이다. 이때 많은 청소년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어떤 글쓰기를 할 것인가 전략이 필요한 순간, 문학입시 안에서 쓰는 글과 밖에서 쓰는 글을 완전히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그 밖의 글은 변방의 예술이 된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향유하는 문화에는 도무지,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청소년문화는 기존 문화의 깊은 하위문화로 다뤄지거나, 돌연 나타난 별종처럼 취급되어 왔다. 충분한 비평과 관찰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에 늘 피상적으로 해석되면서, 이 흐름이 청소년이 스스로 형성한 ‘문화’라는 것마저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가 불가능해지면 청소년 문화는 고립되고, 점점 가난해진다.
우리는 청소년이 저자인 출판물을 얼마나 접해봤을까? 그것을 구매해 읽어본 경험은 얼마나 될까? 선생님이 아이들의 글을 엮어 문집으로 만든 것을 제외하면, 청소년 저자의 책은 더욱 찾기 어려워진다. 청소년이 쓴 소설의 정식 출판은 아주 드물게 장르소설 시장에서 발견되고, 대부분 서브컬쳐에서 자비출판에 해당하는 형태 또는 게시글로 공유되고 있다. 청소년은 전통적인 ‘종이’ ‘인쇄물’의 권위에 조차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왜 청소년에게 더 많은 지면이 주어지지 않는 걸까? 제도는 어째서 청소년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나?
문제는 ‘청소년’이 아니라 ‘청소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에 있다. 청소년을 포함하지 못한 사회는 청소년과 그가 주체인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대신 청소년을 배제함으로써 성숙하지 못한 사회의 일면을 숨기려고 한다. 청소년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청소년이 쓰는 글이 아니라 청소년이 쓰는 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곳에 있다.
청소년의 존재를 지지하고 그들과 연대해야 할 문학이, 사회가 청소년을 배제하는 이유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청소년이 쓴 글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건 치명적인 문제다. 청소년이 쓴 것은 완성도가 떨어질 것이라며 염려하는 일면에는 그들이 ‘미완성된’ 존재이고, ‘성장하는 도중’이기에 글 또한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 전제되어있다. 지금 출간되고 있는 성인 작가의 소설은 모두 충분히 ‘성숙’ 한가? 출간된 작품은 ‘완성’되었나? 나는 청소년 작가가 쓴 글의 완성도를 나이를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는 경향을 지적하고 싶다. 기존 문학의 분류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견은 사회가 청소년을 구분 지어 ‘보존’하려는 것과 닮아있다. 청소년의 글은 특수한 ‘시기’로서의 가치만을 가질 뿐, 작품으로서 가치 있게 평가되지 않는다. 때문에 청소년 주체가 모인 청소년 문학계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그들의 문학사가 쓰이지 못하며, 우리는 새로운 당사자-예술 문화의 탄생을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다.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동 청소년 문학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 의견들 중에서도 유독 망설임 없었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약자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문학이기 때문’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때 들었던 의문이 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었다. ‘왜 대신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그들이 낸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았으면 했다. 약자의 목소리가 되는 것 보다, 약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꾸준히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아동청소년이 처한 억압적 현실, 그리고 지금의 그들에 대한 관심 없이, 그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없이 청소년문학에 합당한 윤리가 세워질 수 있을까? 청소년 문학은 스스로의 예술이 청소년을 주체가 아닌 대상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한계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수많은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예술에서조차 청소년이 등장하는 순간 작품은 청소년 억압의 인력에 이끌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청소년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예술의 인력이 작품에 한정된다면, 청소년이 예술 실행의 주체가 될 때는 이 모든 인력을 자신의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때문에 나는 더욱더, 청소년 창작자와 비청소년 창작자의 연대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청소년 억압의 문제는 곧 청소년 예술의 문제이다. 동시에 청소년 예술의 문제는 청소년 억압의 문제이다.
청소년이 쓴 작품이 청소년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청소년이 써야만 진정한 청소년 문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청소년이 쓴 작품도 당연히 청소년 문학이며, 문학계 안에서 논의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 하고 싶었다. 청소년을 위한 문화가 가진 일방적임을 인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대상자의 자리에 머무르는 청소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배제되고 만다. 청소년이 쓴 청소년 문학과, 비청소년이 쓴 청소년 문학이 균형을 이루게 될 때 청소년 문학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선명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청소년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평등하게 이야기될 때 청소년 문학계의 진정한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차는 청소년을 싣고 제도 위를 달리고 있다. 성장까지 달리는 급행열차에서 아이들이 내릴 수 있는 역이 없는 지금, 만약 단 하나의 역이라도 청소년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면, 청소년이 쉬어가고, 거쳐가고, 원치 않는다면 편히 지나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분명 더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이번 역은 청소년 문학계, 청소년 문학계.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열차는 플랫폼을 향해서 천천히 감속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던 창밖의 풍경이 역사(驛舍)의 모습을 비출 때, 아이들은 이어질 방송을 향해 귀를 기울인다.
내리실 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