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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읁 May 20. 2020

포스트 코로나, 차별과 문명손실

전염병의 역사와 함께 도시의 역사 또한 같이 흘러간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흑사병의 창궐은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어 낸다. 죽어나간 소작농들의 노동력을 대신할만한 기술이 필요했고, 노동력이 비싸지고 그에 대응할 기술 투자가 늘면서 봉건 영주제는 도시 자본제로 바뀌게 된다. 대규모 전염병의 창궐이 유럽의 근대적이고 상업화된 경제성장을 가져온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19가 만연하고,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감염자는 47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사망자 또한 30만 명을 초과했다. 코로나 19를 '21세기의 흑사병'이라고 불리며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뉴 르네상스 시대를 열 것이라는 '포스트 코로나'시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이 시국에 가장 핫한 뉴스일 것이다.


흑사병의 엄청난 인명 손실이 불러온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끔찍하게도 잃어가고 있는가?


유럽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중국의 우한에서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양인에게 무차별적인 인종차별을 퍼붓는다. 묻지마 폭행, 심한 욕설, 혹은 직장 내 은근한 따돌림까지. 코로나 감염으로 인한 사망이 아니라 인종차별의 폭행으로 인한 사망률도 적다고 볼 수 없다. 차별에 대한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나라는 어떤가.

하루에도 수차례 울리는 긴급 재난문자. 확진자의 거주지역과 동선이 구청 홈페이지에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도시의 네트워크망은 굉장히 세세하고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지금 같은 국가비상사태에는 개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조심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의 존중이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이따금씩 너무 잔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끊임없는 개인정보의 적나라한 공개는 사회가 개인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아주 좋은 트리거였다. 잠재적 감염자를 보다 쉽고 빠르게 색출해내기 위함임을 잘 알지만, 이를 접한 사람들은 확진자 개인의 동선을 보며 불륜이니 성소수자니 민폐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등의 말들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무엇인가 찝찝하고 걱정되는 느낌은 저버릴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쌓아온 문화를, 문명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긴 연휴기간 내에 제주도 방문객이 18만 명이 넘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여전히 한강과 술집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룸쌀롱과 같은 불법 성매매업소도 호황이었다. 코로나가 잡혀가는 것처럼 보일 때 쯔음, 다수의 사람들이 안전에 불감을 느꼈을 것이고 경솔하게 행동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지금, 비난과 조롱의 시선의 끝엔 누가 서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신 중앙집권화로 정부의 공공적인 역할이 더 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의 힘이 더 커진다 하더라도,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사생활 존중과 자유의 권리는 아주 중요하다. 때문에 기지국을 통한 개인정보 습득에 대해 당연하듯이 말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들먹이며 비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우리가 포커싱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 양심, 뭐 그런 것들이 아니다. 개인에 대한 비난을 퍼붓기에 앞서, 어느 누구도 언제든지 소수의 입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소수의 입장에서 개인을 존중하고 개인에게 사회적 분노를 표출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오히려 보균자가 검사를 기피하게 되어 더 악화된 상황을 만들게 된다던지, 거짓 동선을 고해 감염경로 파악을 늦추게 된다던지 등의 좋지 않은 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처럼 공공의 개입이 개인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인지하고, 질병관리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도 주의하고 고려해야 한다.


고단하고 지친 행색의 질병관리본부장님의 얼굴을 보면서, 하루빨리 코로나가 잡혀야한다고 기원했다. 도시는 죽어가고 있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없고,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개학만을 기다리던 어린아이들은 학교는커녕 놀이터에도 나가지 못한다. 회사라고 다를 바 있는가, 그들 또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재택근무를 하며, 대학생들은 사이버강의를 듣는다. 의료진은 코와 귀가 닳도록 마스크를 끼고 방역복을 입으며 우리 사회의 재생을 위해 고단함을 감수한다.


이번 코로나에 대한 인지와 이해를 돕고 확산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투명한 '소통'이 맞았다.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이 담긴 정보공개가 선행된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 대상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던질 수는 없다. 이러한 정부의 투명하고 직설적인 소통방법이 코로나의 확산을 막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득이 될 수도, 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며, 어떤 제도든 받아들이는 주체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은 사람이다는 어느 혹자의 말에 공감하면서,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가비상사태라고 해도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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