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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Oct 24. 2023

화려한 세상

말도 안 되는 단편소설

오전 11시. 사무실에 들어갈 수 없다. 사무실에는 창문이 있지만 거의 열어놓지 않는다. 열어도 환기가 잘 되는 편이 아니다. 버스도 타지 못하고, 식당도 가지 못한다. 출퇴근하고 외식하는 일상적인 생활은 이제 끝났다.


병원에서 이런 부작용에 대해서는 경고하지 않았다. 고도 근시라 망막이 약하다며 시력을 잃을 수 있다고 자주 검진을 오라고 했다. 백내장도 진행되고 있다며 진행을 막는 안약과 먹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다음 날 일어나 출근하고 옆자리 노대리와 커피 마시며 어제 먹은 안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컴퓨터를 켜고 업무 준비를 하면서 안약을 넣고 1시간 정도 지난 뒤부터였다. 세상이 화려해졌다.


 공기의 온도가 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것이라고는 안과약 밖에 없으니 이유는 이것 말고는 없다. 안과는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검색하니 오늘부터 3일간 개인 사정으로 휴원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처음에는 눈이 잘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색이 선명해 보였다. 옆자리 노대리 입에서 숨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노대리가 평소 비염이라고 했지만 그걸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주황색 공기가 입에서 빠져나와 주변으로 흩어지며 색이 노란색, 연두색, 초록색으로 바뀌며 연해졌다. 그중 일부는 다시 주변의 투명한 옅은 파란색 공기와 함께 다시 입으로 들어갔다 주황색으로 나오기를 반복했다. 내가 이제껏 노대리 입에서 나온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던 거야? 놀라기보다 혐오감에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앞자리, 뒷자리 할 것 없이 모두 주황색 숨을 코로 입으로 내쉬고 옅은 파란색 숨을 들이쉬었다. 김 과장님은 오른쪽 콧구멍이 막혔는지 숨이 조금만 나오고, 왼쪽 콧구멍과 입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있었다. 문제는 모두가 내쉰 숨이 사무실에 퍼지는 것이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색만 바뀌며 모두의 입과 코로 드나들고 있었다. 갑자기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박차고 사무실을 나왔다.


가을의 선선한 공기는 투명한 옅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사람이 적은 곳에 가니 사람들의 숨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큰 숨을 몇 번 쉴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엉덩이에서 간간히 주황색이 나온다. 엉덩이 골을 따라 옷감을 뚫고 서서히 퍼져나가는 사람도 있고, 힘차게 밖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다. 맙소사. 환기도 안 되는 사무실에 어떻게 들어가지? 사무실에 사람이 12명이나 있다고! 내 코에서도 주황색 공기가 나오고 흩어져 간다. 당장 내 숨이 다시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적응이 안 된다.


주변 식당에서 주황색 공기가 문 위쪽으로 솔솔 뿜어져 나오고, 자동차 배기구에서는 주홍색 공기가 나와서 주황색, 노란색, 연두색, 초록색 등 서서히 차가운 색으로 변해 흩어진다. 빌딩의 열린 창에서는 옅은 파란 공기가 창 아래쪽으로 들어가고, 연두색 공기가 창 위쪽으로 나와서 주변으로 흩어진다. 세상이 화려하다.


사무실에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시계를 보니 11시 반. 사무실로 가긴 해야지.


사람이 지나가면 숨을 쉬기 힘들다. 그 사람의 날숨을 내가 들이마시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이제 난 끝났다. 사무실에서 근무도 할 수 없고, 미어터지는 지하철은 말할 것도 없다. 외식도 바이바이다. 옆 자리 손님이 뀐 방귀가 어떻게 퍼지는지까지 다 보이는데 뭐가 입에 들어가겠는가. 혼자 사는 방법이 있나? 내가 디지털 노마드로 살 능력이 되던가? 앱으로 배달되는 물건들의 범위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가다 '이제 성생활도 끝난 것인가? 결혼도 못 하겠구나'까지 가니 아찔하다. 병원이 문을 열자마자 항의하러 가야겠다. 마스크를 준비하고 가리라. 손이 아프다. 나도 모르게 너무 꼭 쥐었구나. 병원이 어느 쪽이었지? 어? 어!


색이 사라졌다. 공기의 색이 사라졌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코에서 아무 색도 보이지 않는다. 만세! 만세! 난 살았다고! 그래도 안과는 따지러 가야겠어. 반드시 따질 거야! 안약 안 넣어!


12시. 노대리는 점심 먹으러 가자며 한 마디 했다.


언제부터 실내에서 이렇게 마스크를 열심히 끼고 사셨어요?



사진: UnsplashPapa Casti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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