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안 방천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밥상이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작가는 “모든 것은 기억에서 출발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모내기를 했던 스물다섯 살 여름의 기억마저도 희미해졌다. 어쩌면 기억 속의 밥상에 나오는 그릇이나 상황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아이들에게 모내기 밥상은 맛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내기가 끝나고 뒤풀이가 시작될 때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눈깔사탕이 더 맛났다. 세월이 흘러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이 아쉬워서인지, 요즘은 달라진 풍경이긴 하지만 들판을 보니 모내기 밥상을 잊을 수가 없다.
이렇다 할 밥상도 없이 논두렁 비슷한 곳에서, 어른들은 방천이라 불렀던 것 같다. 논과 논 사이, 논두렁보다는 조금 넓어서 리어카가 다닐 정도의 길바닥에 앉아 모내기하는 중에 일찍 중참을 먹고, 점심은 대부분 이웃집도 비슷했다. 밥상의 구성은 이렇다. 밥그릇은 생각이 안 나지만 밥과 나물 몇 가지가 한 그릇에 담겼던 것 같다. 아마도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니고, 양은그릇(스텐 이전에 나온?)이었던 것 같다. 국그릇은 박을 반으로 자른 큼직한 박 바가지에 토란이 들어간 들깻국을 듬뿍 담고, 밥은 조를 넣은 찰밥을 지어 감나무잎에 갈치를 한 토막씩 쪄서 양념을 끼얹어서 나왔다. 새벽 6시에 모내기가 시작되어 점심때가 되면 아이들은 엄마를 찾아 ‘너희 엄마 누구 집에 모심으러 갔니 “ 하며, 각자 엄마가 누구 집에 모심기를 갔는지 대충 알고 함께 논으로 갔다. 당시 우리 동네는 72 가구가 사는 박 씨 집성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내기 품앗이를 했다.
모심기는 주로 엄마들이 했고, 아버지들은 줄잡이를 했다. 논 양쪽에 남자 두 사람이 줄을 잡고 있으면 엄마들은 어림잡아 모를 한 줌 한 줌 줄을 맞추어 심었다. 밥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밥상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른들은 논에서 나오면 불어난 다리에 거머리가 붙어서 피가 물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떼어냈다. 당시는 거머리가 많았다. 가끔 논에 뱀이 스쳐 다녀서 무서웠던 기억과 초등학교 때 여러 명이 모여 방천에서 어른들이 논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지쳐서 몰래 리어카에 한두 명씩 태워 다니다가 리어카가 논으로 굴러 떨어져 혼이 났던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어른들은 식사를 한 다음 줄줄이 방천에 누워 선잠을 자고 다시 모내기를 하러 논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방천에서 모내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오로지 땅콩이 들어간 노란 설탕이 발린 눈깔사탕을 기다렸다. 모내기하는 집주인이 모내기를 끝내기 직전에 과자봉지를 들고 나타나면 아이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기린 목을 하고 시선을 고정했다. 모내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눈깔사탕을 입안에 넣어서 녹이고, 어른들은 한 집 모내기가 끝나면 옆집에 가서 일손을 도와 서둘러 들판에 모내기를 끝내고 뒤풀이를 하듯 부어라 마셔라, 어스름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동네는 모내기를 하면 아이들이나 노인들 식사까지 챙겨주고, 주변 논에서 일하는 이웃까지도 목청을 높여 “누구누구야 밥 먹으러 오이라” 하고 여기저기서 불렀다. 옛날에는 먹을 게 없었다고 하지만, 이웃끼리 나누었던 인심은 지금보다 야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내기 밥상은 엄마가 오전 내내 음식을 만들어 어른이 계시는 이웃에 밥상을 차려 드리고 종종걸음으로 리어카에 빼곡하게 음식을 싣고 음식이 쏟아질까 봐 조심조심 논으로 가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시골 모내기는 인심을 나누고 일손을 보태고, 뒤풀이로 작은 축제라도 하듯 막걸리 한 사발에 늘어진 노랫가락으로 고된 몸과 마음을 달랬던 것 같다.
당시는 맛을 모르고 먹었던 보내기 밥상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따뜻한 이웃과 동무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어서인 것 같다. 언제부턴가 눈깔사탕과 박하사탕이 단팥빵으로 바뀌었다. 그때 먹었던 단팥빵이 꿀맛이었던지 지금도 단팥빵을 좋아하고, 엄마가 끓였던 그 토란국을 먹을 수가 없어서 더욱 생각난다. 골안 방천에서 먹었던 모내기 밥상과 동무가 지금은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