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시골에는가을걷이가 끝나면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여러 집에서 나눴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니 큰 가마솥에 기름진 돼지고기와 가을 무를 큼직하게 비슷 썰기를 하고, 큰방 윗목에 온기가 덜한 곳에서 물을 주고 키운 콩나물과 대파를 송송 썰어 마늘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장작불을 피워서 오래 끓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 국밥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때는 그 맛을 몰랐다. 돼지 소장인지 대장인지 그 속에 피를 채워서 쪄내는 순대 또한 얼마나 맛이 있었을까! 그게순대일 줄이야!엄마가 무거운 가마솥뚜껑을 열면 하얀 연기처럼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이웃 동네 금곡양조장 막걸리를 사 오고, 순대와 돼지국밥이 끓으면 온 동네 잔칫날이 되었던 추억이 남았다.
부산하면 돼지국밥이다. 언제부터 돼지국밥이 부산 대표 음식으로 알려졌다. 오래전부터 구 부산진구청 건너편에 '장수돼지국밥'이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 그 집 돼지국밥이 부산에 와서 처음 먹어본 돼지국밥이다. 당감동에 살 때였다. 남편과 약속을 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 서면으로 갔던 날이 결혼기념일이었다.
엊그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가 42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4번의 강산이 변한 지금 같으면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어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당시는 젊어서인지 무척 기분이 상했다. 기념일을 잘 챙기는 사람도 아닌 데다약속했으니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하려나 잔뜩 기대하고 나갔다. 빈손이었다. ‘그럼 그렇지' 만나자마자 국밥집으로 직행을 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따라간 곳이장수돼지국밥이었다. 매장 안 분위기는 결혼기념일과는 동떨어진 부산 사람이 다 모인 듯 와글와글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얼굴이 굳어가고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여기 국밥 두 그릇 주소.”라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서 집으로 가버리고 싶었지만, 뒷감당이 난감해서 꾹 참았다. ‘차라리 나오지 말걸’ 후회를 했다. 돼지국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일어서자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말이다. 세월이 흘러, 왜 젊은 날은 그렇게 사소한 일들에 수많은 감정을 묶어서 마음을 상했는지, 속 좁은 나를 바라보게 된다.
부산 맛집을 소개할 때 돼지국밥집이 흔하게 열거된다. 내게 돼지국밥은 맛집이 아니다. 지금도돼지국밥 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그렇게 멋없는 남자와 40년을 넘게 함께 살아간다는 일은 기적 같은 일이다. 맛도 멋도 너무나 다른 사람이 만나 오늘까지 살아가고 있다. 가끔 돼지국밥을 함께 먹어주고, 포장을 해서 밥상을 차리는 나는 갈치와 여름 과일을 좋아한다. 알고나 있을까?
그다음돼지국밥의 만남은집 앞에 도착한 택시 문을 열자 뒷좌석에 검은 봉지 손잡이가떨어진 채 쓰러져 있는‘범일동 60년 전통할매국밥’집수육이다. 동료들과 저녁으로돼지국밥을 먹고 가족들 생각이 났던지 수육을 포장해서 몇 차례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돌다가 12시가 넘어서 인사불성이 된 남편과 함께 도착했다. 다음 날 먹어보니까 수육이 쫄깃하고 먹을만했다. 며칠 뒤 토요일 가족 외식을 하러 범일동 할매국밥집으로 갔다. 매장은 복잡했다. 요즘은 수요미식회에나온 후 줄 서기가 귀찮아서 60년 전통할매국밥은 뜸해졌다.
또 다른 단골집은해운대 신시가지로 이사를 오니까'밀양 돼지국밥'이인기가 있었다. 10년 이상 남편의 유일한 맛집이었다. 어쩌다 가족 외식을 하면 딸 둘을 데리고 기호와는 상관없이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불만을 털어놓을 만도 했건만 아이들은 아빠의 식성에 따랐다. 밀양 돼지국밥이 장소를 옮기면서 밀양 돼지국밥도 멀어졌다. 그 후 해운대 신시가지 '신창국밥'으로 간다. 포장을 해 오기도 한다. 그렇게 남편의 돼지국밥 사랑은 일편단심이었다. 하루 세끼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이다.
드디어, 70이 된 지금은 돼지국밥 횟수가 줄었다. 볶고삶고 굽던 돼지고기도 일주일에 하루는 연어회를 먹고. 가끔은 복국을 먹는다. 함께살아오는 동안 돼지고기를 자주 먹었다. 남편의 식성에 따라 밥상을차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아무거나’가 되었다. 나는 입버릇처럼 “일 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라면과 거의 매일 마시는 커피가 이로운 음식이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남편은 외식을 싫어한다. 아직도 조선 시대 밥상을 원한다. 외출에서 돌아오다 한 번쯤은 외식해도 좋으련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다. 앞으로는돼지국밥 주세요를 가로채서 “갈치구이 2인분 주세요”라고 내가 먼저 주문을 해야지 한다.
이제 말할 수 있다. 각자 입맛에 맞는 메뉴를 먹자고. 그 좋은 시절, 젊은 날 나는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오늘은 신창국밥에 가서 따로 돼지국밥과 수육을 포장해서 저녁상에 앉아서 그 젊은 날의 이야기를 하며 노부부의 묵은 사랑을 다져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