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심부름 담당은 늘 나였다.
유년 시절, 나의 가장 큰 불만은 심부름이었다. 어릴 땐 아빠들이 슈퍼에 가서 담배나 소주 심부름을 시키던 일이 흔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보통 그런 심부름이 있으면 장남이나 장녀를 시키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우리 집은 연년생 오빠와 내가 둘이나 있는데 왜 막내인 나만 시키는 건지, 우리 집 심부름 담당은 5살때부터 자연스럽게 내가 맡았다. 방에서 학습지 숙제하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을 때면, 엄마는 어김없이 노크를 하신다. ‘딸 오늘은 두부 좀 사 올래?’ 라고 하실 땐, 나는 ‘오빠가 있잖아!’ 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엄마는 ‘잔돈 남으면 먹고 싶은거 사먹어’ 라며 나를 항상 그렇게 다루셨다. 단순했던(?) 나는 엄마 꾐에 넘어가 터벅터벅 심부름을 다녀오곤 했다.
그래도 엄마를 따라 몇 번 시장에 갔던 덕분이었는지 시장길에는 훤했다. 평소에는 주로 엄마가 대화를 하기 때문에 내가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심부름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장 이모들하고 소통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 갈 때마다 이모들은 ‘아이고 예뻐라 오늘은 혼자 왔나’ 라며 더 챙겨주시곤 했다. 나는 ‘이모 쪼금만 깎아주세요!’ 라며 조금은 어눌하지만 당당하게 얘기했던 것 같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에 우리 집을 바라봤는데, 엄마가 망원경을 들고 내가 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엄마가 왜 심부름을 시켜놓고 날 계속 지켜보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고생했다며 얼른 올라오라며 해맑게 웃는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심부름을 다녀오고 나면 집에 와서 엄마는 시장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냐며 궁금해하고 물어보셨다.
그리고 자주 가던 문방구가 있었는데 갈 때마다 친구는 늘 엄마 손을 잡고 와서 엄마가 골라주는 학용품을 사는데, 나는 늘 혼자서 취향대로 고르곤 했다. 문방구 아줌마와도 제법 안면을 터서 서비스로 오락하라고 동전을 주셨던 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붙임성이 생겼던 것 같고 말하는 것에도 주눅들거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일까, 내가 어른들한테는 스스럼없이 말을 잘 붙인 이유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홀로 심부름을 나가서 가장 중요하게 얻은 가치관은 자립심이다. 보통 장애를 가진 부모님들은 자식이 밖에 나가서 험한 꼴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물론 요새는 장애학부모만이 아닌 비장애학부모들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똑같은 것 같다. 아무래도 자식이 귀해서일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스스로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할 시간들이 찾아온다. 학창 시절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왔을 때 나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진 운명이다. 그 당시 나는 의사소통이 서툴고 안될 때는 당황스럽고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나 상황은 일어난다. 그때 배웠던 홀로서기는 내가 서울에 50만 원만 갖고 상경할 수 있던 패기의 밑거름이었다.
나중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그 심부름은 꽤나 귀찮았지만
자립심 강한 내가 태어났던 순간이라고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