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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통 Jan 02. 2021

이야기 속 무의식

백 년의 고독

수많은 꿈들과 무의식 장면들이 뒤엉켜 최고의 문학작품이 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에 대해 쓰고 싶은 날이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891&cid=58814&categoryId=58831


1. 라틴아메리카의 슬픈 역사와 함께 한다.


  평화롭게 살던 ‘마꼰도’는 한 명, 두 명씩 들어온 외부인들에 의해 변해간다.

물론,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집시떼들이 새로운 문명을 살짝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마술’ 같은 일로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만, 이 마을의 실질적 주인인 부엔디아만큼은 새로운 문명에 호기심을 보인다. 그의 호기심은 순수하게 ‘학문’ 그 자체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기에 마을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그러나, 바나나 공장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가 들어오는 순간, 마을은 약간의 활기를 띠고 바쁘게 돌아가는 듯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들은 급료 대신 햄을 받고 쉬는 날도 없이 하루 종일 일만 한다. 배불러지는 건 당연히 바나나 공장의 주인들 뿐이다. 결국 노동자들은 당연한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지적 무능함을 조롱하는 변호사들과 간계한 업주들, 이런 업주들과 결탁한 정부 관료들의 합작으로 그들의 최소한의 요구는 묵살당한다.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그들은 대항하지만 그들의 대항은 무 차비한 학살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정부와 언론은 이 사실을 통제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다. 결국, 그 사건을 목격한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만이 진실을 설파하려 하지만 주민들은 그를 정신이상자로 생각할 따름이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실은 때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때론 ‘광기 어린’ 이들의 목소리도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마콘도의 역사는 유럽 및 미국 등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세계들에 의해 유린, 착취당한 라틴아메리카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에 마콘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분분할 수 있지만,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진실 역시 신기루처럼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무나 이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마콘도 마을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사라짐으로 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역사들 역시 ‘유토피아의 그곳’으로 남겨둔 게 아닌가 싶다.


타의로 인해 착취당하고 그들에게 유린되며 ‘잊혀진’ 채 살아가는 건 식민지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도 그 운명의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또한, 십여 년 전까지도 금기시되어왔던 ‘광주 민주화운동’도 진실을 묻어버리려 했었던 마콘도의 정부군을 떠올리게 하며, 자유파 대 보수파의 지리한 싸움도 한반도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탈식민주의 시대 과연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인식해야 하며, 앞으로 어떤 식의 관점으로 세상을 인지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2.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탁월한 지점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다. 우르술라는 눈을 잃어갔지만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면서 가족들의 내적, 외적 특징까지 치밀하게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사랑과 공감이 부족해서 그런 행동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깨달았으며, 그가 뱃속에서 흐느껴 운 것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다.

또한, 부엔디아 가문의 가족 사람들은 비참하게 ‘고독하게’ 세상을 하직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일생을 자신만의 세계에서 고독하게 보낸다. 물론, 표면적으로 그들 중 일부는 쾌활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공포, 고독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 근본은 모두 ‘고독’이라는 지점으로 귀결된다.

마르케스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다양한 캐릭터들의 모습으로 소개하지만 그 내면에 깔린 ‘고독’과 심연의 공포, 외로움, 탐색에 대한 열정 등이 부엔디아 가문의 모습임을, 그게 마꼰도를 이루는 요소였음을, 그게 바로 인간의 본연의 모습임을 설파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어차피 인간은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삶의 문제는 혼자 감당해야 하고 혼자 해결해야 한다. 때론, 이러한 점들을 망각할 때, 삶은 무너지고 타인에 집착하게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마르케스는 그 점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 같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 요즘, 타인과의 거리는 당연한 예의이자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코로나로 인한 죽음은 혼자서만 감내해야 하는 그야말로 ‘고독한 죽음’이 되었다.


인간의 삶은 고독할 뿐이며, 고독 속에서 인류는 잘 버텨오고 있고, 앞으로도 잘 버텨 갈 것이다.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3. 삶은 계속 순환된다.


 부엔디아 가족들은 특별한 행동이자 의식 등을 행한다. 부엔디아 대령은 황금 물고기를 만들고 다시 녹이고 다시 만들고 다시 녹인다. 아마란따는 수의를 짓고, 다시 풀고 다시 짓는다. 양피지를 해석하고 멈추고 다시 해석하고.. 그들의 운명 역시 계속 순환된다. 삶은 돌고 돌아 다시 원래로 돌아오게 된다. 마치 우르술라가 작아진 채로 죽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부엔디아 사람들은 모두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왔고(메메의 경우는 아니지만), 죽음은 ‘삶의 기원’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백 년의 고독을 운명으로 타고난 가계는 두 번 다시 이 지상에 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멜키아데스의 예언은 ‘고독’과 ‘삶의 순환’을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맞서 나가라는 뜻으로 들린다. 즉, 그 운명과 순환에 끌려다니며 ‘고독’ 속에서 세상을 외면하기보다는 꿋꿋하게 세상을 견디며 맞서 싸우는 게 진정한 ‘고독’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작가는 일깨워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4. 종교의 위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17명의 아들들은 머리에 새겨진 십자가 마크 때문에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의 나약함을 지탱해주는 종교는 그들의 강인할 수 있는 정신들을 오히려 꺾어놓으며 그들이 더 쉽게 죽음의 표적이 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외쳤던 종교로 인해 그들은 너무나 쉽게 ‘먹잇감’이 된 것이며, 구원은커녕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 죽음을 가깝게 하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구원을 믿고, 구원을 향했던 그들은 구원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페르난다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 허울과 맞물린 이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질적인 삶의 형태를 띠게 되며 주변인들의 삶들을 혹독하게 만듦과 동시에 자신의 삶 역시 고독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는 신부들 역시 하나 같이 마르께스에게는 조롱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니카노르 신부는 그의 신앙이 흔들리까 봐 과학과 선진 문물의 지식으로 무장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더 이상 찾아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먼저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미지의 국가에 종교인들을 파견하고, 그 이후 정세 파악이 되었다 싶으면 하나씩 야욕을 드러내곤 했다. 마르케스도 이 점을 마꼰도의 종교 생활과 종교관 등에 빗대어 표현하고자 한 것 같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종교는 실상은 인류를 파괴하는 살상 과정에 이용되었음을 말이다.


5. 마술적 리얼리즘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 적인 묘사들은 이 작품을 더욱더 황홀하게 만든다. 여러 결정적인 순간들에 등장하는 이 묘사들은 인간의 상상력이 과연 얼마나 아름답고 문학이 느끼는 힘이 얼마나 강렬한지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느껴지게 한다. 상징과 우화로 점철된 이 작품에서 이런 마술적 리얼리즘의 요소는 단순히 이 작품이 인류가 느끼는 그 마술적 경이로움, 자연의 신비함, 우주의 신성함까지 모조리 아우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한다.


“인간이 일등칸에 타고 문학을 화물칸에 싣게 된다면, 이 세상은 개떡같이 끝장나고 말 거야” 이게 사실은 마르케스가 제일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 나온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잊지 말라고 외쳤던 바나나 공장 학살 사건에 대해 노래했던 '라디오헤드(Radiohead)'의 'banana co'를 들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aasUSp2g0



*바나나 공장 학살 사건은 아래 위키피디아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Banana_Massac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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