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더 파더(The father)> (플로리안 젤러, 2020)
이미 연극 각본, 연출로 명성이 있는 플로리안 젤러의 스크린 데뷔작 격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공간 활용이 좀 더 두드러졌던 건 연극 무대 경험의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씬과 씬 사이의 자연스러운 전환은 ‘공간’이라는 특수성을 잘 활용했기에 더 돋보인다.
공간의 연출 말고도 음악 역시 하나의 크나큰 장치로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비제의 <진주잡이>의 오페라 아리아인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 이토록 잔인하고, 애절한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감독이 의도한 연출은 아니겠지만(감독은 이 아리아를 영화에 활용한 이유가 단순히 ‘앤서니 홉킨스’가 좋아하는 곡이라서 그렇다 했다.), 아리아의 대사는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앤소니 홉킨스 분)의 심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치매’ 환자라고 하면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 ‘치매’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 가족의 아픔, 진단받고 나서의 두려움 등을 아울러 그려지는데 (대표적으로 ‘스틸 엘리스’, 2014), 이 영화는 ‘치매’ 환자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방금 일어난 것 같은데, 벌써 자야 할 시간이라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기막힌 상황, 얼굴과 이름이 자꾸 혼란스러운 상황, 등 아버지는 끊임없이 삶의 ‘혼돈’에 그야말로 내동댕이 쳐진다.
아, 이토록 ‘치매’ 환자의 심리를 정교하고 세련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의 섬세한 연출이 매우 돋보인다. 긴 복도는 마치 아버지의 긴 터널과 같은 마음을 대변하고, 시계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 지나간 시간, 현재의 시간, 앞으로의 시간 등 엉켜있는 실타래를 풀어줄 열쇠 같은 거라고 믿고 있는 무의식적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결국, 엉켜버린 시간의 실타래를 풀 열쇠마저 이제 그의 손목에 존재하지 않을 때, 그는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원초적 두려움만 남는 그 순간, 그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으로, 처음 우리가 세상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당당한 아버지도 아니고, 딸에게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리는 아버지도 아니고, 고집불통의 아버지도 아닌, 그저 하나의 여리고 여린 ‘인간’ 그 본연의 모습 말이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건, 앤서니 홉킨스라는 대배우가 펼치는 연기의 향연에 기인한다. 첫 등장과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지는 숨 막히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지막에 그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그 심정이 절로 이해가 간다. 젤러는 오로지 배우를 앤서니 홉킨스로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썼다는데, 그만큼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앤서니 홉킨스를 위한 영화이다. 83세의 나이에 이렇게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 생각하니 그가 거절했으면 아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공간도 순간순간 낯설어 보이고, 세상 돌아가는 게 이해가 안 가는 치매 환자도 있지만, 치매라는 진단명을 받지 않아도 어느 순간순간 이 세상은 나에게 낯설고 세상은 내가 이해되지 않은 채, 이해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라며 모든 게 낯설 게 보이고 느껴진다. 그렇지만, 성인이기에 올곧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어버린다. ‘엄마’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채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익숙한 복도가 낯선 복도가 되어 길고 길게 느껴져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좌절감 들은 온전히 나만 겪어야 하는 실패의 상흔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아버지’ 조차도 그럴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면 삶의 안도감과 삶의 비극과 삶의 쓸쓸함이 모조리 느껴진다. 또한 앤소니의 ‘앤?’을 부르는 음성이 계속 귓가에 맴도며, 그의 혼란스러운 표정 “귀에 익은 그대의 음성” 또한 한동안 잊히지 않는다. 비제가 이렇게 훌륭한 작곡가였다니!
https://www.youtube.com/watch?v=Q1rTaw3O1w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