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자기 연대기>를 가다
경주에서 도자기 전시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름도 거창하게 <한국 도자기 연대기>를 내걸고, 경주시내 구도심 금리단길의 작은 공간에서 7월부터 9월말까지 매일 오후 시간에 열립니다(일요일은 휴관).
작은 전시회이지만, 오시는 분이 작품 앞에 앉아서 한참을 볼 수 있도록 의자를 두었습니다. 도자기 전시를 하니 오는 사람마다 "나는 도자기를 잘 몰라서..."라고 입을 뗍니다. 누군들 도자기를 처음부터 잘 알았겠습니까? 가만히 보고, 오래 보고, 지긋이 보노라면 무언가가 전해져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대체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각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진이든, 그림이든, 조각이든, 도자기이든... 배우고, 경험이 늘어가면 이해하는데 도움이야 되겠지만, 예술작품과의 만남에는 원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전시장에 마련해둔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도자기 작품들을 들여다 보다가, 득도하는 순간을 얻어가시기를 원합니다.
전시장의 여러 작품 중 가장 최근에 해겸도요에서 구워낸 작품으로 '천목' 혹은 일본에서 흔히 부르는 이름으로 '덴모쿠'가 한 점 나와 있습니다. 이런 도자기 중에서 매우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을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마냥 투박하게만 보였는데,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고 담담한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이 전시회의 작품은 대부분 경주 해겸도요에서 구워낸 작품들이고, 이번 전시회의 기획자인 도자기 평론가 이용범 선생의 개인 소장품도 일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규모가 작은 전시회이지만, 작품들의 연대기적 구성은 매우 알차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전시의 전면에 표방하는 기획 의도는 세계 최고 고려청자를 신라토기에서부터 내려오는 한국 도자기의 연대기 위에 재배치 해보자는 것입니다. 흔히 고려청자는 9-10세기 신라후기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해졌고, 고려시대에 세계 최고 수준의 청자를 만들어내었다가, 조선시대 이후로는 주로 백자가 도자기 산업을 주도하는 가운데 청자의 기술은 쇠퇴해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현대 청자는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감청자를 만들어내고는 있지만, 고려의 최전성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려청자를 논하는 것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영화를 반추하는 회고적 작업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경주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하고, 상감청자에서도 고려시대의 작품에 비견할 수준의 높은 성취를 보이고 있는 도공이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궁금증이 생겼습니다만, 그건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일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예술작품은 누가 설명해줘서가 아니라 작품 그 자체를 맞닥뜨렸을 때 전해지는 감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석산 아래 해겸도요에 처음 방문했을 때, 아, 이것이 청자의 미감이구나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명을 더 들어보니 그것이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작업 과정에서 어떤 숙제를 풀어낸 것인지, 다른 작업과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태토와 유약과 불이 작업의 핵심을 이루는데, 다른 현대의 재현노력과는 좀 다른 길을 택한 해겸 선생은 21일간 가마에 불을 때며 불을 다스리는 노력을 긴 시간 경주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결과물이 그 노력의 성공 여부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해서 이번 전시의 숨은 기획 의도는 해겸 김해익 선생의 작업을 대중들에게 인상 깊게 소개하는데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전시장의 해겸도요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한국 도자기 연대기'를 설명하는 교재인 동시에, 이 모든 시대를 아우를 정도로 해겸 선생의 작업 세계가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작품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도자기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전시 기간 중 초반 5주에 걸쳐 토요일마다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신라토기, 회유토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주제로 이어가는 강연은 전시장의 작품들을 갖고 전후좌우 맥락을 설명하고, 비교해가며 진행합니다. 매 시간, 시작할 때는 도자기들이 뿌옇게 보였다가, 마칠 때쯤이면 상당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작업은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전시회와 강연은 무료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주에 살거나, 경주를 다녀가는 길이면 한번 들러보시기를 권합니다. 전시장에서는 설명을 청해듣기 전에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을 먼저 가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본 자신의 느낌을 바탕으로 궁금한 대목을 하나씩 질문하시면 좋습니다.
전시에 대한 안내: https://bit.ly/3xXt4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