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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프디 Oct 16. 2021

막 찍은 거 같은데...?

두기봉, <흑사회1>(2005)

영화적이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이라면 자주 생각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많이, 그리고 깊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볼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각자가 품고 있는 개인화된 답만 있을 뿐이다. 그 답이 얼마나 더 적절한가, 시대에 맞는가, 도전적이고 개성 있는가로 그 사람이 만든 영화 혹은 영화에 대한 감상의 깊이와 폭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좋은 감독들은 훌륭한 자신만의 답을 갖고 있다는 건 자명하다. 그런 감독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답에 충실하여 그것을 믿고 영화를 만든다. 영화를 만드는 길고도 험난한 시간 동안 그 답이 지지대가 돼서 수많은 방해와 압박을 이겨내게 한다. 두기봉 감독도 그렇다. 나는 고작 해봐야 두 편의 영화, <흑사회>와 <익사일>을 봤지만 그 두 편 만으로도 그의 신념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흑사회>와 <익사일> 두 영화 모두에서 동일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홍콩 누아르 장르를 향한 헌신, 영화의 활기와 운동성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 등등.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 마디로 정의할 만큼 단순한 것이었다면 전 세계 영화학교마다 두기봉이 한 명씩은 존재했을 것이다. 또 그것을 안다고 해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두기봉은 자신의 답에 강한 믿음을 갖고 영화를 만든다. 고작 두 편 보았지만 감히 확언할 수 있다.


막 찍은 거 같은데? 스토리보드 없이 찍었나? <흑사회>를 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영화를 다 보고 검색을 해 보니 내 추측이 맞는 것 같다. 정확히 <흑사회>가 그렇다는 말은 없지만, 애초에 두기봉 감독이 스토리보드 없이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고 한다.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는 쇼트의 구성이 무계획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봉준호처럼 스토리보드를 100프로 다 그리는 감독들의 영화들과 비교해보면 분명하게 다가온다. 두기봉의 쇼트들은 언뜻 보기에 중구난방이라고 느껴질 만큼 무계획적이다. 영화를 찍기 전에 쇼트를 정해놓지 않고 현장에서 결정된 흔적이 많다. "Just try it." 인터넷을 뒤지다가 누군가 홍콩 누아르 영화에 대해 써 놓은 글귀였다. 계획 없이 일단 찍어본다는 것이다. 두기봉, 성룡, 오우삼이 그러하고 멜로드라마 장르 쪽에선 왕가위가 그러하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타고난 천재들이란 생각이 든다. 학창 시절 수학을 공부할 때를 떠올려 보면 나는 선생님이나 교과서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차근차근 배워서 문제를 풀었는데 수학 천재였던 친구 한 명은 누구도 가르치지 않고 생각지 못 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 결과적으로 문제는 둘 다 풀었지만 나의 풀이를 봤을 땐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는 수준이었다면 천재 친구의 풀이는 감탄을 자아냈다. 홍콩 감독들의 영화는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틀에 박히지 않고, 전통을 답습하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충실해서 영화를 찍는다. 결과물은 감탄을 자아낸다. 계획 없이 찍는 게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낸다면 다 그러면 되지 않나 싶지만, 영화를 찍어 본 사람들이라면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것이다.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자신의 감각을 투자자들에게 납득시켜야 가능한 일이다. 계획을 하지 않으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스토리보드를 짜는 가장 큰 이유는 한정된 자본 때문이다. 봉준호도 인터뷰 중에 말했는데 스토리보드 없이 찍으라면 찍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상업 영화란 워낙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자본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작업의 경제성과 상호 신뢰를 위해서 스토를보드를 최대한 디테일하게 짠다고 한다. 스토리보드 없이 찍을 때 돈이 많이 드는 이유는 말하자면 이렇다. A와 B의 무협 대결을 찍는다고 생각해보자. 일반적인 촬영 과정이라면 일단 A를 다 찍는다. 그리고 카메라를 반대쪽으로 옮겨 B를 다 찍는다. 그래야 카메라를 이동시키는 시간, 조명을 설치하는 시간이 절약되고 결과적으로 예산을 아낄 수 있다. 반면 홍콩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가 상영되는 그 순서대로 찍는다. 감독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영화를 그대로 그 순서대로 찍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도 <킬빌1>의 마지막 시퀀스인 1대 88 결투를 "홍콩식으로" 찍었다고 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그 방법이 "더 유기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덜 경제적이지만 더 유기적인 촬영 방식인 것이다.


그런 촬영 방식이 영화의 활기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활기.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장르에 상관없이 영화의 활기는 공통된 목표가 아닌가 생각한다. 활기라는 단어 때문에 액션 영화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활기를 만드려고 무작정 달리고 날아가고 질주하고 때리고 폭발하는 흔한 헐리우드 액션 영화보다 홍상수 영화의 술자리가 더 활기 있다. 활기란 영화의 생명력, 캐릭터의 생동성, 상황의 실제성, 진실성 등등과 관련이 있다. 영화의 탄생은 '활동 사진'이었다. 움직이는 사물을 필름에 담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물의 활기를 말이다. 하여튼 영화의 활기는 그만큼 어렵고 깊이 있는 담론이다. 분명한 건 <흑사회>는 분명 활기가 있다는 것이다. 액션 장면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 활기를 알 수 있을 것이므로 비교적 점잖아 보이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자면 삼합회 원로들의 투표 장면이 있다. 차를 따르는 잔의 인서트로 시작하는 장면은 원로들이 차기 회장 선출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쇼트들로 이어진다. 뇌물을 받아 따이디를 지지하는 원로 한 명이 다른 원로들에게 따이디를 지지 하도록 강요한다. 중간중간 쇼트의 가장자리에 차를 따르는 당숙부의 모습이 살짝씩 걸친다. 논의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차를 다 따른 당숙부는 투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차를 마시라고 한다. 원로들 모두 입을 다물고 차를 마신다. 여기부터 한 쇼트로 길게 이어진다. 차를 한 번 마시고, 남은 차를 붓고, 두 번째 우린 차를 따르고, 그걸 마실 때까지가 단 한 쇼트로 약 30초 정도이다. 카메라는 느릿느릿 달리 위에서 이들의 앞을 거닐고 라디오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은은한 음악이 흐른다. 천장의 선풍기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다. 시나리오에 이 장면을 묘사한다면 '원로들이 차를 마신다.'말고는 딱히 떠오르지가 않을 정도로 줄거리 상으로는 할 말이 별로 없는 장면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자라면 분명 이 장면을 빼라고 감독을 압박했을 법한 언뜻 보면 있으나 마나 한 장면이다. 영화 용어로 말하자면 데드타임이 되겠다. 죽은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이 없으면 영화는 생명력을 잃고 마는 아이러니한 시간 말이다. 두기봉은 그 한 쇼트로 관객들을 삼합회 원로들의 모임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우아하고 나른하게, 한편으로는 차를 따르는 당숙부라는 사람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지켜보게 한다. 그 모든 것들이 활기를 만들어낸다.


오직 영화적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감각으로 두기봉은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홍콩 누아르 장인은 매끄럽고 윤이 나는 또 하나의 홍콩 누아르 작품을 빚어내는 듯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가서 두기봉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다. 그는 결말에서 영화를 여느 홍콩 누아르 영화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하고 믿었던 록이라는 인물이 관객을 배반하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 내내 세계관을 지지하던 법칙들을 처참히 부숴버린다. 조금만 실수했어도 김 빠지는 결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두기봉은 너무나 훌륭하게 그것을 해냈다. 감독의 결기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좀 더 살펴보자면 다른 살인 장면들과 다르게 이 장면은 살인을 끔찍하게 다룬다.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상 살인은 원래 끔찍하게 나오지 않는다. <흑사회>도 마찬가지다. 결말 이전의 살인 장면들은 장르적으로 다뤄졌다. 멋있고 쾌감 있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록과 따이디가 손을 잡고 타 조직의 두목을 암살하는 장면을 보자. 초반에는 따이디가 록을 죽일 것 같아서 서스팬스가 느껴진다. 알고 보니 이는 타 조직의 두목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쾌감을 느낀다. 타 조직의 두목을 죽이는 장면은 멀리서 어둡게 찍었고, 큰 담요 같은 걸 덮어 놓고 때려서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따이디가 내리치는 술병에 맞는 머리와 칼에 찔리는 부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명이나 카메라 워크, 편집이 너무나 장르적인 쾌감에만 전념하고 있다. 하지만 록이 따이디와 그 부인을 죽이는 마지막 장면은 다르다. 전혀 장르적으로 찍지 않았다. 너무나 현실적인 대낮의 자연조명 아래에서, 돌로 머리를 내리치고 나뭇가지로 목을 조르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또 록의 아들이 보고 있을 때 살인이 일어난다. 록이 따이디의 머리를 돌로 내리칠 때의 카메라 앵글은 하이앵글인데 이제껏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던 도덕적 판단이 깃든 시선이다. 하이앵글이기 때문에 그 장면은 매우 부도덕한 장면이 되었고 롱쇼트이기 때문에 살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한 마디로 누아르 장르 안에서 관객이 즐기는 살인이 아니라 뉴스 사회면에 나오는 살인처럼 찍었다는 뜻이다. 록의 아들을 경유하는 아이의 시선도 이용하여 그 장면은 훨씬 더 부도덕하게 보인다. 홍콩 누아르 장르를 누구보다 재밌고 우아하게 펼쳐 놓던 두기봉은 영화의 결말에서 갑자기 반대 노선에 선다. 봉준호의 장르 영화에 한국 현실이 침입하는 것 같이 두기봉의 홍콩 누아르에 현실의 도덕이 침입한다. 이로써 영화는 여느 홍콩 누아르 영화와는 다른 훌륭하고 상투적이지 않은 결말을 만들어냈다. 홍콩 누아르 장르의 상징과도 같은 감독인 두기봉은 그렇게 장르의 지평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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